Episode 11. 백로
3월 하순 백목련꽃이 피기 시작했다. 지난해 봄부터 소중하게 키워왔던 꽃눈이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다. 한껏 부풀어 오른 꽃눈은 작은 새 같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밀납초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햇볕이 좋은 아침이면 새가 날아가듯 초에 불을 켠 듯 하늘을 향해 환하게 꽃을 피운다.
같은 시기 소나무숲에도 흰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다. 얼마 전 운전 중에 우연히 발견하고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침엽수인 소나무가 커다랗고 하얀 꽃을 피울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차는 빠르게 그곳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휴일 아침 기억을 더듬어 그 장소를 찾았다. 내가 지나쳤던 고가도로 아래 낡은 교차로 옆으로 나지막한 소나무숲이 있었다. 숲은 대체로 푸르렀지만 고가도로를 마주한 소나무들은 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얹힌 하얀 것들은, 다름 아닌 백로 - 그중에서도 몸집이 작은 중백로와 쇠백로 - 들이었다. 멀리 숲 가장 높은 곳에는 왜가리가 보였다.
나는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고층의 주택에서 살기를 꿈꿔본 적이 없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땅 가까이 외부와 적당히 차단된 곳에서 살고 싶다. 새로 비유하자면 오목눈이 타입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백로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시끄럽고 복잡한 고가도로 바로 앞에 자리를 잡다니.
줄기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뻗은 가지마다 층층이 두세 마리씩 앉아 있다. 고개를 묻고 홀로 앉은 녀석이 있는가 하면 주변의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짝짓기를 하는 커플도 있고, 호시탐탐 남의 둥지를 노리는 녀석들도 있다. 둥지의 만듦새는 시원찮다. 까치집을 기준으로 비교해도 조립식 그늘막 수준이다. 가래가 끓는 듯한 새된 울음소리도 훤칠한 외모와는 영 딴판이다.
그런 백로를 바라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로 시작하는 옛시조가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그리고는 곧바로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가 자동으로 이어진다. 누가 억지로 외우게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위선과 부조리가 일상이었던 어린 시절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지금은 좀 나아졌나? 글쎄다.)
6월 즈음이면 새로 태어난 새끼들로 소나무숲은 발 디딜 틈이 없이 붐빌 것이다. 다시 한번 하얀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어미들은 어린 자식들이 자신의 본분대로 착실히 살아가도록 가르치겠지. 그리고 새들에게 내려오는 옛시조를 가르칠지도 모른다. '인간들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이어서 '까마귀 검다 하고 인간들아 웃지 마라'...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투표를 했다. 대파 반입 금지 같은 웃픈 해프닝 때문인지 사전투표율은 역대 최고를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