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스물여덟 10년 차 직장인 이야기

by 고사리

아무래도 오늘은 운수가 좋았다. 출근길 횡단보도는 지체 없이 파란불이 켜졌고 버스는 예정시간에 오차 없이 도착했다. 햇살은 따뜻했고 바람은 부드럽게 두 볼을 스쳤다.



회사에 도착하면 유니폼으로 환복을 한 후 청소를 한다. 백화점 오픈 시간은 10시 30분. 직원들은 한 시간 전 출근을 마치고 오픈 준비를 시작한다. 청소를 마치면 계산대에 필요한 시재를 맞춘다. 만원 다섯 장, 오천 원 열 장, 천 원 마흔두 장, 오백 원 열개, 백 원 서른 개, 총 15만 원에 시재를 맞추면 준비는 끝이 난다. 오픈 준비를 마치고 직원들끼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가족 이야기 남자 친구 이야기 등등 주제가 만 오천 가지 정도는 된다. 대략 30분가량 이야기를 나누면 오픈을 알리는 방송이 흐른다. 직원들은 그걸 '개점행사'라고 부른다. 간단한 스트레칭 후 고객 응대 매뉴얼 등 서비스에 필요한 안내멘트가 나오면 백화점에 하루가 시작된다. 나는 B1층 식품관 식료품 매장에서 고객을 응대한다. 왠지 뻣뻣해진 어깨를 두어 번 돌리고는 업무를 시작한다.



아 참 오늘은 쇼핑백 속지를 끼우는 날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쇼핑백을 펼쳐보면 두꺼운 도화지가 바닥 아래를 받치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게 사실 직원들이 하나하나 끼우는 것이다. 다른 지점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지점은 그렇다. 한 박스에 200개씩 두꺼운 속지를 쇼핑백 안으로 집어넣는다. 예전에는 하나 끼우는데 몇 분이나 걸렸는데 이제는 생활의 달인에서 촬영을 나와도 무관할 만큼 순식간에 끝 낸다. 오랜 기간 연습 끝에 습득해낸 방법이다. 나는 이 일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일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고객 응대한다. 징크스가 하나 있다. 첫 고객으로 진상고객을 만나면 하루 종일 진상고객을 응대한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맞이 인사로 응대를 시작한다. 인사는 기본이지만 보통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고객님 봉투 필요십니까?


툭-

첫 고객은 장바구니를 던졌다. 싸한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우리는 2인 1조로 팀을 이룬다. 팀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한 명은 계산 한 명은 포장을 맡는다. 나는 던진 장바구니를 옆 직원에게 전달한다. 우리는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 '아뿔싸 진상이구나..'


-고객님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툭-

이번엔 카드를 던진다. 그것도 제 앞에 나에게서는 아주 멀게. 내 눈은 카드로 향하고 팔을 뻗어 내쳐진 카드를 끌고 온다. 전처럼 얼굴이 붉어지지는 않는다. 제법 익숙해지고 여유가 생겼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니다. 분하지만 견딜 만큼에 연차가 쌓였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고객을 응대하는데 대략 3~5분 정도에 시간이 소요된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감정들에 휩싸인다. 분노, 우울, 행복, 슬픔, 고객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직원들 중 한 명이겠지만 우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할퀴어져 상처를 입는다.


-첫 손님부터 진상이네~ 소금이라도 뿌려야 하나? 너무 신경 쓰지 마 아휴~ 가다가 넘어져 버려라!


나 대신 화를 내주는 직원들이 있어서 웃는다. 하지만 큰일이다. 첫 고객 진상이다. 나는 여태껏 징크스를 깨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도 하루 종일 진상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




12시부터는 점심시간이다. 백화점 9층 비상구 안쪽으로는 구내식당이 있다.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배식을 받고 식사를 한다. 나는 구내식당을 싫어한다. 꽤나 어린이 입맛으로 소문이 났는데 구내식당에는 몸에 좋은 반찬들로만 잔뜩 준비되어 있다. 예를 들면 콩밥이라던지 나물반찬이라던지.. 그래서 웬만하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주어진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다. 습관처럼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개인위생관리를 철저히 한 후 다시 업무를 재게 한다. 우리는 12시 1시 2시 총 세타임을 교대로 식사를 마친다.



다시 돌아온 계산대는 붐비는 고객들로 시끌벅적하다. 무슨 일인지 직원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분명 진상이 흘리고 간 잔상 같았다. 사건의 전말을 들어보니 젊은 고객 두 명이 학력을 운운하며 직원을 무시했다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자면 '계산원은 대학을 안 나와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대학을 나온 사람한테나 물어봐야겠다.'의 말 따위로 계산대 직원을 모욕한 것이다.



-문의 내용이 뭐였나요?


복잡한 감정이었다. 분노, 그리고 의문,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직원을 저런 태도로 무시했는지가 궁금했다.


-할인쿠폰이 있다는데 우리 쪽에는 확인되는 게 없다고 했더니.. 대학을 안 나와서 모른다고 하네



알고 보니 다른 직원에 착오로 비롯된 실수였다. 애초에 고객에게 할인쿠폰은 없었고 그걸 모르는 계산대 직원은 억울하게 무시를 당하게 된 것이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진상고객들은 대부분 원하는 걸 얻지 못했을 때 직원을 무시하고 모욕한다. 소리지르기는 기본이며 욕설을 포함한 비방을 서슴지 않는다. 이곳에서 직원들은 대부분 수십 년을 근무하며 온갖 억지를 마주하고 살았다. 하지만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금방 잊는 법을 택할 뿐이다. 이번에도 다음에도 우리들은 익숙해지지 않을 일들을 잊으며 사는 법을 택한다.




이상하리만큼 운수가 좋은 아침이었다. 횡단보도는 지체 없이 파란불로 바뀌었고, 버스는 예정시간에 정확히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를 예견한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힘든 하루가 될 터이니 아침은 기분 좋게 시작하라는.. 어쩌면 하늘이 내게 준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