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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챠 Feb 24. 2024

늘 너를 믿어주고 싶어

사랑하는 딸, 오늘은 침몰해 가는 배를 버리고 탈출한 항해사, 짐의 이야기를 해주려고 해.


짐이 일등항해사로 탄 배는 파트너 호였어. 승객을 정원보다 한참 초과해서 태운 파트나 호는 목적지로 가던 길에 과적으로 인해 크게 금이 가. 배의 상태가 불안정한 걸 알았던 항해사, 짐은 배가 위험하다는 걸 깨달아.


그런데 하필, 그때였어. 열대 바다에서 스콜이 발생한 거야. 눈 앞에 닥쳐오고 있는 강한 비바람이 보였지. 위험이 닥친 상황에서 짐은 구명보트가 몇 개인지 생각해봐. 배에 있는 구명보트는 사람들을 탈출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어. 만에 하나 구명보트의 숫자가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스콜이 덮치기 전에 배에 탄 많은 사람들을 구조할 시간도 없었지. ‘어떡해야 하지?’ 짐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그때였어. 선장과 다른 배의 선원들이 움직여. 그들은 그들끼리 탈출하기로 하고 구명정을 준비하지. ‘어떻게 배에 있는, 수많은, 잠들어 있는 다른 승객들은 버린 채 자기들만 살려고 하지?’ 짐은 그들을 보고 치를 떨어. 그리고 배를 뛰어다니며 구명정을 확인하지.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들을 살릴 묘안은 없었어.


짐은 살짝 기울어진 선체 끝에 서서 스콜을 바라봐.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곧이어 저 거대한 스콜이 배를 덮치면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는 공포감, 자신도 그와 함께 휩쓸려갈 재난이 임박했다는 두려움. 그런 감정들이 짐의 마음 속에 소용돌이 치지.


구명정을 타고 자기들끼리 탈출한 선장과 일행은 짐을 향해 소리쳐. “뛰어 내려! 뛰라고! 뭘 망설이는 거야!” 짐은 다가오는 스콜을 바라봐. 그리고 선장 일행의 목소리를 듣지. 그리고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배에서 뛰어내리고 말아.


배를 버리고 탈출하려던 무책임한 선원들을 경멸했지만, 자신도 그 배에서 홀로 뛰어내린 거야. 그들처럼 말이지.


이 사건에 대해 재판이 열려. 하지만 말이야, 이 재판은 사실 우스운 것이었어. 왜냐면 사실 파트나 호는 그 날 침몰하지 않았거든.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배도 망가지지 않고 멀쩡하게 남게 돼. 배는 기적적으로 스콜에게 당해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고, 금간 부분은 침몰할 만한 타격을 입히지 않았거든.


“나는 살기 위해 당연한 선택을 했을 뿐이야! 결국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일도 없었잖아!” 라는 생각이었을까. 선장과 일행들은 이국의 땅에서 열리는 재판에 참석하지 않아.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 버리지. 피할 수 있는 모욕, 도망칠 수 있는 치욕으로부터 다들 도망친 셈이지. 딱히 책임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짐은 달랐어. 짐은 그 선장 일행과 다른 사람이었지. 자신이 중대한 순간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도망쳤다는 사실, 의무를 망각하고 제 살 길만 생각했다는 수치심. 그게 짐을 괴롭혀. 그래서 짐은 자신이 재판정에서 견뎌야 할 것을 견디고, 자신이 행동한 것에 책임지기를 원해. 그러니 홀로 재판정에 서게 되지. 결국 항해사 자격을 박탈당하지.


그 후에 짐은 어떻게 됐을까?


짐은 자신이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비겁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몹시 괴로워해. 자신이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었던가? 나는 그렇게 겁쟁이였던가? 하고 말이야. 그런 괴로움이 짐을 짓눌렀기 때문에 어디서 자리잡고 일하지 못하지. 누군가 자신이 도망친 비겁자라는 걸 알게 될까봐, 누가 예전에 파트나 호 사건을 우스갯소리처럼 이야기하기라도 하면 뜨끔하고 말아. 그러니 당연히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고 떠돌이처럼 살지.



이런 짐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한 명 있었어.



그 사람은 말로였어. 말로는 재판에서부터 짐을 지켜봤지. 한참 나이가 많은 선배 격이 되는, 꽤나 명망 있는 선장인 말로는 젊은 항해사 짐을 안타깝게 생각해. 그 두려움 속, 혼란 속에서 뛰어내린 것이 그렇게나 괴로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재판정에 서서 온갖 모욕을 다 감내하다니. 그도 남들처럼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그 치욕을 슬그머니 모른 채 덮어버리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짐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형편없고 몰염치한 팔푼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보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려움에 치여 실수할 수도 있고, 도망칠 때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게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닐 수 있잖아. 말로는 그런 마음으로 짐을 바라봐. 그리고 짐의 이야기를 들어줘. 그리고 짐이 하는 말을 모두 믿어주지.


그런 의미에서 말이야, 떠돌아 다니는 짐이 할 수 있을 법한 일이 무엇일까 고민해 주지. 그리고 적당한 일자리를 찾아주게 돼. 그 일자리는 말이야, 아주 깊고 깊은 오지, 그래서 짐이 배를 버리고 탈출한 항해사라는 소식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 있었어. 짐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었지. 말로는 그 곳에서 짐이 새롭게 출발하기를 바라.


그래서 부족 간의 파벌 싸움이 몹시 심하고 위험한 곳이었지. 하지만 그만큼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곳이었기에, 그리고 그만큼 짐이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을,‘ ’두려워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입증하기에 좋은 곳이었지. 그런 까닭에 말로는 그 일자리를 어렵사리 찾아내 짐에게 제안하고, 짐은 그 일자리를 수락해서 오지로 떠나게 돼.



짐은 성공했을까?
그 위험천만한 깊은 산중에서?


그랬어. 과연 짐은 영특하고, 용감한 청년이었거든. 말로가 믿었던 대로 말이야.


짐은 그곳에 난무했던 부족 간의 싸움을 모두 정리하고 그곳에서 군림하게 돼. 후일 그곳에 찾아간 말로는 짐을 보고 알게 돼. 그 청년은 더 이상 비겁한 패배자도 아니고, 도망자도 아니었어. 그 지역을 재패한, 용감하고 유능한 지배자였지. 말로는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자신을 맞이하는 짐을 보고 반가워 해. 거기서 만났다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기도 하지. 짐은 말로가 믿어주었고, 말로가 기대해주었던 덕분에 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던 거야.


파트나 호를 버리고 도망갔을 때, 그래서 자신의 실패에 파묻혀 괴로워하고 있었을 때, 온갖 모욕과 자기 비하 속에서 괴로운 시간을 보냈을 때, 말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런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라고, 너는 그 실수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짐은 두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까?


말로가 믿어준 덕분에, 말로가 이야기를 들어준 덕분에, 말로가 새로운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짐은 그 기대에 부응할 만한 새로운 삶을 살아낼 수 있었어. 말로의 믿음이 없었다면 짐은 그저 떠돌이로 사는, 팔푼이 청년이 되고 말았을 거야. 그래서일까? 이 소설의 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어.



다른 사람이 믿어 주려는 순간 내 신념이
무한한 힘을 얻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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