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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덕 Feb 23. 2020

행복은 영상 14도로 완성된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영상 14도와 행복의 상관관계


  그날의 우울을 위로해준 건 온도였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상 14도. 바람 조금. 구름 조금. 미세먼지 보통.’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 사이의 14도였습니다.


  그날의 사무실 공기는 갑갑했고,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려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습니다. 계단 입구는 그늘이 졌고, 계단의 절반 정도는 사선으로 햇빛의 영역이었습니다. 14도보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14도보다 따뜻한 햇볕이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습니다. 다양한 결의 온도가 단짠단짠으로 나를 간지럽혔습니다. 일기예보에 그 시간 온도는 14도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만, 온도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계단을 올랐습니다. 타박타박 힘없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습니다. 옥상에서는 이름 모를 새가 짹짹거리고 있었습니다. 라이터 부싯돌 소리가 차르르 지나가고, 담뱃불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려왔습니다. 연기를 들이마시자 목에서 폐로 바람 움직이는 소리가 납니다. 연기는 가슴 안쪽을 쓰다듬고서 밖으로 새어나갔습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연기는 허공에 흩어지고, 하늘에는 하얀 구름 덩어리 몇몇이 둥둥 떠있었습니다. 흰 구름이라지만, 마냥 흰색은 아닙니다. 햇살을 받은 위쪽은 하얗고, 그늘진 아래쪽은 어두웠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눈이 내렸지요.) 하늘은 적당히 파랬고, 그 아래 강남빌딩들도 하늘빛을 받아 적당히 파란빛이었습니다. 저 멀리에서 나를 바라본다면, 나 역시 적당히 파란 점이겠지요. 저 파란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찾아보다, 슬쩍 웃어버렸습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었죠.


  담배 한 대를 태울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은 크게 움직였습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온도, 크고 작은 소리들,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영상 14도의 풍경. 아주 작은 감각들이 강약강약 리듬으로 마사지하듯 마음을 풀어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감정을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없어 거칠게 뭉뚱그려 봅니다. 그날의 행복은 ‘영상 14도. 바람 조금. 구름 조금. 미세먼지 보통’에 있었다고.



  조금은 우습기도 했습니다. 근 몇 주째 풀리지 않던 우울이었습니다.

  마음은 계속 가라앉았고, 영문 모를 우울이라 해소할 실마리 찾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씨앗호떡과 생크림 와플을 잔뜩 먹어보아도 속이 더부룩해서 불쾌하였습니다. 친구들과 술을 진탕 먹어봐도 돌아오는 골목길은 어두웠고, 예능과 드라마를 몰아서 보려 해도 영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임에 몇만 원 현질을 해도 마찬가지였죠.   

  더군다나 그날은 또 주말출근이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금요일 밤에 업무를 요청해서 월요일까지 달라는 상황이라, 삼각김밥 몇 개를 점심 끼니로 챙겨 출근한 참이었죠. 하루 종일 기분은 바닥에서 반지하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만, 옥상으로 몇 걸음 올라갔다고 기분이 좋아진다니. 어이없기도 했습니다.


  약간 우습다가, 스스로를 비웃는 생각은 그만두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날의 영상 14도는, 어쩌면 생크림 조각 케이크의 딸기 같은 거니까요. 즐거워지기 위한 발버둥을 쌓고 쌓은 끝에 얻은 꼭짓점이니까요. 씨앗호떡과 생크림 와플과 술과 친구와 게임으로 쌓아온 즐거움들이 한순간 임계점을 넘어서 나의 주도권을 잡는 순간. 쌓인 우울을 풀어낼 순 없지만, 그 우울보다 더 크게 즐거움을 쌓아내는 시간. 

  나의 노력은 층층이 케이크 시트를 쌓고 크림을 바르는 과정과 같았고, 영상 14도는 그 위에 자리 잡은 딸기였습니다. 이렇게 말하여야지, 나의 지난 노력들에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 굳이 규정해봅니다.


  한 번 그날의 행복을 규정하고 나자, 기준선이 생깁니다. 

  오늘은 다시 겨울답게 영상 1도입니다. 하얀 눈은 차갑게 아래로 쌓였고, 만두집 하얀 수증기는 따스하게 하늘로 오릅니다. 오늘의 공기는 뾰족하여 얼굴을 찌르는 듯합니다. 눈 위에 재를 떨며 풍경을 바라봅니다. 배시시 웃어봅니다. 그날엔 영상 14도의 행복이 있었고, 오늘은 영상 1도의 행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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