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마음이 다시 부드러워지는 곳

설렘이 굳어가기 전에 떠났던 이유

by 포르마


. 한곳에 오래 머물면 서서히 색이 바래고, 다른 공간이 나를 당기는 느낌이 든다.


. 처음 도착했을 때 설렘으로 가슴이 뛰던 도시도, 그곳의 일상에 치여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부드러웠던 풍경이 단단하게 굳어버린다. 마치 수분을 잃어가는 스펀지처럼, 감정의 탄력이 줄어드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이층버스가 당연한 배경처럼 스쳐 지나가고, 한국에 돌아오면 문득 세인트 폴 대성당이 그리워진다.


. 물론 언젠가는 한 도시에 정착해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 일상을 위해 지금까지 공부해 왔고, 또 준비해 왔다. 그래서 기대도 되지만, 조금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정착한다는 것은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일이니까, 더 이상 마음대로 떠날 수 없게 될 것 같은 막연한 감정.


. 그런 감정의 틈 사이에서 일본은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는 조용한 중간지점이 되어주었다. 이렇다 할 목적도 없고, 멀리 떠난 것도 아닌데, 도착하면 늘 마음의 높낮이가 맞춰지는 곳. 나에게 가장 편한 몇몇 사람들처럼, 큰 말 한마디 없이도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장소이다.


. 그래서 2학년 방학에는 일본을 두 번이나 방문했다. 교토에 이미 다녀왔는데도,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다시 한번 훌쩍 떠나고 싶었다. 곧 졸업이 다가오던 시기라서 그랬던 걸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그 끝을 정리할 만한 익숙한 장소가 필요했던 것 같다.


. 일본 여행은 늘 창민이와 함께였다. 그래서 후쿠오카 이야기를 꺼냈을 때, 교토에 다녀온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망설일 줄 알았다. 하지만, 왕복 항공권이 10만 원도 안 한다는 사실 앞에서는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창민이는 후쿠오카에 가본 적이 없었다.


. 우리의 선택은 늘 그렇듯 단순했다. 눈이 마주쳤고, 몇 분 뒤, 예약까지 끝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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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보통 각각의 친구 그룹이 있다. 일대일로 만나는 사이, 동창끼리 다 같이 모이는 사이, 혹은 외부 활동을 통해 생긴 커뮤니티들. 하지만, 나는 가끔 그 경계를 허문다.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들을 연결해 새로운 그룹을 만든다. 물론 아무나 엮어두는 건 아니다. 성격과 취향, 대화의 결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 같을 때만, 충분히 고민하고, 서로의 의사를 물어본 뒤에야 움직인다.


. 이번 여행도 그랬다. 중학교 친구 민영이, 고등학교 친구 창민이. 둘은 서로 일면식이 없었지만, 흔쾌히 여행에 응했다. 우리는 후쿠오카에 도착한 뒤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민영이와 합류했다. 셋이 처음 마주했을 때,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조합, 잘 되겠다.” 그 감각은 오랜 친구를 만났을 때처럼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기류 같았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여행 이후로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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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오카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해외여행의 첫 관문 같은 도시다. 정보도 넘쳐나고, 현지인들도 관광객을 상대하는데 익숙하다. 나는 이미 5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었고, 이번엔 유명한 관광지보다 후쿠오카의 일상을 걷고 싶었다. 그때는 흘려보냈던 풍경을 천천히 훑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속도를 보고 싶었다.


. 그렇게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영국에서 지내는 나를, 타지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 이곳에서 내가 느끼는 부드러움과 태도를, 누군가 나에게서도 느낄 수 있을까?


.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스쳤다.

. 이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여기도 언젠가는 단단해져버릴까? 처음엔 부드럽던 도시도 오래 머무르면 굳어가는 것처럼, 스펀지가 마르듯 익숙함이 풍경의 질감을 바꿔버리는 것처럼.


. 그 질문들은 여행의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여행을 더 깊게 만들었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향한 곳에서조차, 나는 결국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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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늘 궁금했다. 사람들은 여행지의 카페에서 쉬어갈 때,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 잠깐의 휴식처럼 주어지는 한두 시간 동안, 관광지에 대한 감상평을 주고받기도 하고, 방금 먹은 음식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기도 하고, 다음 동선과 일정에 대해 조율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혹은 한국에서와 다름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른다. 우리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조합이었기 때문에 대화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서로의 학교 이야기, 겹치는 지인, 웃겼던 에피소드, 관심사까지 의도해서 꺼내지 않은 주제가 계속 옆으로 흘러나왔다.


. 그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후쿠오카의 풍경은 마치 우리 셋의 새로운 일상처럼 느껴졌다. 잠시 머무는 여행지가 아니라, 이곳에서 누군가의 하루를 간접적으로 살아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이야기에 빠져 있다 문득 창밖을 바라봤을 때, 비로소 이 도시의 결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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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진 오호리 공원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물가를 따라 산책하는 사람들, 책을 읽는 노인들, 그리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초등학생들까지. 대수롭지 않은 움직임들이었는데, 그 사소함이 이 도시의 속도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 후쿠오카의 진짜 하루는 관광객이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리듬 위에서 돌아가는 것 같았다.


. 호텔에 돌아온 뒤, 우리는 편의점과 근처 이자카야에서 포장해온 음식들을 늘어놓고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낼지 상의했다. 방 안에서는 일본 TV 뉴스가 흐르고 있었고, 마침 지역 축제에 대한 소식이 방영됐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는 설명을 들은 순간, 셋 모두 같은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곧바로 지도를 켜 위치를 확인했고, 그렇게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 채워졌다.


. 축제에 도착하자, 전날 뉴스에 나온 할아버지가 눈앞에 보여 괜스레 반가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띈 건 유난히 많은 아이들의 무리였다. 형형색색의 모자를 쓰고, 작은 손에는 간식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일본의 다른 대도시들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다정하고 소박한 생기였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만든 공기와 밝음이 후쿠오카라는 도시의 표정을 결정해 주는 것만 같았다. 어른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의 감정에 따라 하루의 온도가 조금씩 바뀌는 도시.


. 여행은 늘 비워둔 하루가 더 오래 남는다.

. 이 하루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후쿠오카에서 나는 이렇게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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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o Ralph Lauren / 시어서커 스트라이프 셔츠 (Blue/White)

가벼운 코튼 시어서커 100%의 반팔 스트라이프 셔츠. 후쿠오카의 9월 공기는 아직 한여름처럼 뜨거웠고, 얇게 올라온 시어서커의 입체감과 통풍이 그 열기를 흘려보냈다. 블루·화이트 스트라이프는 햇빛에 살짝 번지듯 맑았고, 공원과 호숫가를 오가는 도시의 속도와 부드럽게 맞아떨어졌다.


· Pottery / One Pleated Fatigue Shorts (Dark Navy)

코튼 79% 린넨 21% 혼방 원단의 퍼티그 쇼츠. 단단한 직조감이 움직임을 막지 않으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짙은 네이비 컬러는 셔츠의 밝기를 잡아주며, 시원한 터치감이 무더위 속에서 숨통을 트여 준다. 후쿠오카의 차분한 일상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톤을 만들었다.


· New Balance / Flip Flop (Black)

가볍고 쿠션감 있는 EVA 소재의 블랙 플립플롭.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도 발걸음을 가볍게 해줬고, 공원의 잔디와 흙길에도 발을 안정적으로 편안히 잡아줬다. 계획보다 기분이 우선이 되는 여행일수록, 이런 단순한 신발이 하루의 속도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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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특별한 계획 없이 하루를 흘려보냈다. 하지만, 그 비워둔 시간이 오히려 후쿠오카라는 도시를 더 선명하게 보여줬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만드는 소리, 공원 벤치에 내려앉은 그늘의 온도,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수 캔의 차가움 같은 사소한 감각들이 조용히 마음의 층을 정돈해 주었다.


. 나에게 일본은 도망치듯 찾는 곳이 아니라, 영국의 단단한 일상과 한국의 빠른 속도 사이에서 숨을 고르게 해주는 완충지대 같은 장소로 남을 것 같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익숙하지도 않은 그 거리감 속에서 내 감정의 높낮이가 천천히 균형을 되찾았다.


. 이번 여행에서 특별했던 건, 도시가 아니라 그 도시를 함께 걸어준 사람들이었다. 걷는 속도가 자연스레 맞춰지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 많아지고, 같은 장면을 보며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어색함이 없던 시간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조용하게 만들고, 더 솔직하게 만드는 순간들이었다.


. 그렇기에 후쿠오카는 내게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부담 없이 내 속도로 숨을 쉴 수 있던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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