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만 원짜리 알루미늄 상자

흠집이 멋이 되는 유일한 캐리어에 대하여

by 포르마


. 기내 수화물 벨트 앞에 서 있으면, 수십 개의 캐리어가 일정한 속도로 돌아 나온다. 자신의 짐을 기다리는 이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나는 늘 사람들의 옷차림 · 말투보다, 캐리어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 솔직하게 보여준다고 느낀다.


.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여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든 캐리어, 부서진 손잡이나 바퀴를 테이프로 감아 놓은 캐리어, 뽁뽁이로 칭칭 감아 충격을 막아놓은 캐리어까지.


.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가장 많은 건 때 묻지 않은 어두운 색계열의 하드케이스다. 흔적이 적어 새것처럼 보이는, 튀지 않는 선택들. 나 역시 그렇다.


. 여행이라는 가장 개인적인 순간에도 사람들은 묘하게 비슷한 물건을 고른다. 캐리어만큼은 개성보다 ‘안전한 선택’이 우선시 되는 영역 같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 사이로, 몇 년 전부터 명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캐리어가 하나 있다.


바로 리모와(RIMOWA).


내게 리모와는 다이슨이 처음 유행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을 준 브랜드였다.

“아, 이 제품이 이 가격에 팔릴 수 있구나.”

그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던 순간.


. 리모와는 여느 명품 브랜드처럼 로고를 과시하지도 않고, 대놓고 사치를 외치는 디자인도 아니다. 그러나 공항 벨트 위를 천천히 지나가는 리모와에는 묘한 존재감이 있다. 사람들은 이 캐리어에 기꺼이 높은 비용을 지불한다. 단지 ‘유행’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유다.


. 알루미늄 소재의 가벼움과 단단함, 은은하게 번지는 광택, 직선으로 구성된 견고한 미감. ‘잘 만든 물건’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점은, 리모와가 소비자에게 제품의 ‘노화’를 긍정하게 만든 몇 안 되는 브랜드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캐리어는 깨끗함이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리모와는 정반대다. 흠집이 생길수록 오히려 그 사람의 시간과 여행이 드러나고, 사용자들은 그것을 ‘멋’이라고 말한다.



. 내 주변에도 리모와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대학 시절 플랫 메이트였던 홍콩인 친구, 찰리. 그는 함께 런던에 갔을 때도, 심지어 나를 보러 한국에 왔을 때도 늘 리모와를 끌고 다녔다. 그래서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소비 이유를 듣고 싶어 직접 물어봤다.


찰리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세 가지를 말했다.

Durable. Good-looking. Trendy.


하지만 그도 한 가지는 망설임 없이 인정했다.

“솔직히 overpriced야.”


. 좋아하는 브랜드지만, 가격의 대부분은 결국 ‘리모와’라는 이름값에서 비롯된다고. 그는 그걸 브랜드 헤리티지의 힘이라고 표현했다. 역사 · 이미지 · 상징성, 이런 것들이 캐리어를 단지 짐을 담는 도구가 아닌,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 찰리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리모와는 단순히 ‘좋은 캐리어’의 문제가 아니라, ‘브랜드가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부여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을.



사람들은 여행에서 편리함만을 찾는 것 같지만, 그 여행을 함께 겪어줄 동반자 같은 물건을 고르기도 한다.


“여행의 시간은 짧지만, 여행의 흔적은 오래 남는다.”

리모와가 브랜드로서 붙잡은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흠집이 생길수록 멋이 된다는 믿음, 캐리어가 닳아가는 과정마저 개인의 서사로 남는다는 감각, 기스가 나도 ‘망가졌다’가 아니라 ‘더 나아졌다’고 받아들이는 태도.


대부분의 캐리어가 새것일 때 가장 아름답다면, 리모와는 사용된 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브랜드였다.


그래서 평생 A/S를 제공한다는 문장조차 기능적 보증이 아니라,

“당신의 기록을 오래 지켜주겠다.”는 약속처럼 들린다.


리모와 캐리어, 당신은 비싼 돈을 주고 구매할 의사가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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