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없이 떠나, 같은 순간에 머물다
. 영국 대학교의 학사 과정은 3년이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 나는 한국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 유학이라는 본질을 최대한 흐리지 않고 싶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영국과 유럽 국가, 그리고 몇몇 중국 친구들이 주를 이뤘다. 독해와 듣기에만 강점을 보였던 영어를 드디어 ‘언어’로써 사용할 수 있다고 나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선택은 소기의 성과를 가져왔다.
.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서울대의 절반 정도 크기로 제법 규모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 작은 도시에 살던 30명 남짓의 한국인을 길에서 심심찮게 마주칠 때면, 나는 늘 흠칫하곤 했다.
. 한인회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 건, 학부 생활의 딱 절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기숙사 헬스장에서 혼자 운동하던 어느 날, 뒤에서 들려온 한 문장이 나를 멈춰 세웠다.
“저기… 혹시 한국인이세요?”
그 순간의 당황스러움과 어색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 어느 그룹에 속하든, 시간이 지나도 계속 얼굴을 보게 되는 사람이 한두 명쯤 생기기 마련이다.
. 내게는 그 사람이 지산이 형이었다.
. 형은 Film and TV Production을 전공하고 있었다. 국내 방송 업계에 일하며 단편 작업을 이어오다, 영상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이곳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 나는 나와 전혀 관련 없는 분야의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편인데, 형의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유독 흥미롭게 들렸다. 현장에서의 경험, 카메라 뒤의 세계, 내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난해한 영화 이야기들까지, 내게는 낯선 만큼 더 매력적이었다.
. 처음 한국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외향인을 연기했다. 하지만 지산이 형은 달랐다. 다섯 살 차이가 나는 동생에게도 포장 없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해줬다. 그 솔직함이 대화를 편안하게 만들었고, 어느 순간 형과 보내는 시간이 자연스레 늘어나기 시작했다.
. 나는 물론 혼자 하는 여행도 좋아하지만, 누구와 함께 가느냐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산이 형과 함께라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래서 먼저 여행을 제안했다.
. 솔직히 목적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산이 형이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바로 가장 저렴했던 프라하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 기대감이 전혀 없으면 만족감이 높아진다. 우리에게 프라하는 딱 그런 도시였다.
.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방문하는 곳임에도, 왜 유독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도시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체코는 내가 유럽에 오기 전에 막연히 상상했던 유럽의 전형적인 분위기와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나라였다. 사람들은 무심한 듯 친절했고, 매일 아침 숙소 근처에서 마약에 찌들어 벼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멈춰 서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소매치기나 위험한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 나는 날씨에 따라 컨디션이 오락가락하는 편이지만, 프라하에서는 흐린 날씨조차도 기분을 가라앉히기보다 되레 개운함을 전해줬다. 거대한 유럽풍 건축물과 도시 곳곳에 세워진 동상들,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노면전차와 천천히 골목을 지나는 마차, 그리고 단풍이 섞여 만들어내는 색감은 마치 ‘낭만’이라는 단어가 이 도시를 설명하기 위해 탄생된 것처럼 느껴졌다.
. 쇼핑센터의 번잡함이나 프랜차이즈 간판이 치고 들어오는 대신, 도시 전체가 마치 하나의 영화 세트장처럼 조용하고 느릿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걷기만 해도 장면이 바뀌고, 골목을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 느낌. 가끔은 내가 정말로 트루먼쇼 속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생각보다 과장이 아니었다.
. 프라하는 의외로 ‘영화의 도시’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영화 명문 학교가 있고, 감독 · 촬영 · 연출 분야에서 특히 강세를 보인다. 이 학교에서 배출된 사람들이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수차례 수상했고, 유럽 영화교육 자체를 만들어낸 주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지산이 형이 프라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당연했다. 영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이 도시는, 풍경 하나만으로도 이미 완성된 컷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나의 일상을 촬영하러 온다고 해도, 프라하라면 기꺼이 허락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서라면, 평온하게 살아가는 일상 자체가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기록할 가치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 나는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간다면, 필수 관광지와 식사, 그리고 카페는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지만, 그 외의 시간은 동행하는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산이 형과 함께한 프라하에서는 혼자 왔다면 하지 않았을 두 가지를 실행에 옮겼다.
. 첫 번째는, 스파르타 프라하의 축구 직관.
. 혼자였다면 “굳이…?”라는 생각에 도시 외곽에 있는 경기장까지 찾아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둘은 축구를 사랑했고, 로시츠키와 네드베드가 몸담았던 구단의 공기를 직접 느껴보자는 형의 말 한마디에 금세 설득되어 버렸다.
.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잔디 냄새와 관중석의 검붉은 물결, 그리고 현지인들의 힘 있고 거친 응원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유명한 매치도 아니었지만, 그 열기만큼은 내가 봤던 어느 유럽 축구보다 더 생생했다.
. 경기가 끝나고 시내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데, 웨이터가 우리가 두른 스파르타 프라하 머플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You chose the right team.”
이 스몰토크 한 번에 낯선 도시에서 환대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여행은 이런 사소한 장면들 때문에 가치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두 번째는, 현대미술관(쿤스트할레) 감상.
. 어느 도시에 가든 박물관은 꼭 들르는 편이라 익숙했지만, 이번 방문은 조금 달랐다. 형은 작품 하나하나를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었고, 나는 유명하거나 취향에 맞는 작품 위주로 빠르게 훑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먼저 앞서 나가고, 형은 조용히 뒤에 남아 한 장면에 더 오래 머물렀다.
. 여행 일정이라는 시계는 항상 짧았고, 형이 작품들 앞에서 느끼는 ‘아직 다 못 봤다’는 아쉬움이 눈에 보여 미안함이 스치기도 했다. 내 페이스에 맞추느라 형이 본래의 템포를 포기하는 것 같아서였다.
. 그러다 미술관 안의 카페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만약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위기를 느낄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프라하는 단순히 날씨가 좋았다는 말 이상의 감동이 있었다. 그곳에서 본 풍경만큼은, 여행의 목적이 아니었던 순간이 본질이 되어버리는 경험이었다.
지산이 형은 외출할 때 항상 모자를 쓴다, 항상. 이번 여행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캡 모자 · 항공 점퍼 · 좋아하는 밴드가 프린팅되어 있는 티셔츠 · 와이드 슬랙스 · 운동화.
하루 종일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편한, 형다운 옷차림이었다. 생활의 리듬에 맞춰진, 일종의 작업복에 가까운.
. 반면, 나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프라하에서는 괜히 꾸미고 싶었다. 평소라면 조금 부담스러웠을 조합인데, 이 도시의 공기에 잘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같은 공간을 걷고 있었지만, 형은 프레임 너머를 쫓고 있었고, 나는 도시가 나에게 입히는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프라하에서 나는 이렇게 입었다
· POKERFACE / Mr.Doctor Coat (Dark Navy)
캐시미어 100%로 된 다크 네이비 코트. 무게감은 가볍지만, 어깨에서부터 곧게 떨어지는 실루엣 덕분에 몸이 한 번에 정돈되는 느낌이 들었다. 원단의 은은한 광택이 돌길과 건물 위로 살짝 떠올랐고, 과장된 디테일 대신 소재와 길이로 존재감을 들어내, 도시의 풍경을 가리지 않고 조용히 어울려 주었다.
· 무신사 스탠다드 / 스트라이프 릴렉스 핏 옥스포드 셔츠 (그레이)
면 100%의 옥스퍼드 원단으로 만들어진 그레이 스트라이프 셔츠. 약간 거친 직조감이 네이비 코트의 포멀함을 살짝 풀어주었다. 단추를 한 칸 풀어, 여행자의 여유와 도시의 단정함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스트라이프가 은근한 깊이를 만들어 단순한 기본템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 무신사 스탠다드 / 리사이클 투 턱 와이드 히든 밴딩 슬랙스 (미디엄 그레이)
재생 폴리·레이온 혼방의 그레이 슬랙스. 매트한 질감이 톤을 부드럽게 이어줬고, 넉넉한 와이드 실루엣이 오래 걸어도 편안했다. 움직일 때마다 생기는 미세한 주름이 코트와 셔츠의 단정함을 적당히 눌러주었고, 발끝으로 떨어지는 라인이 프라하의 느릿한 속도와 잘 맞아떨어졌다.
여행을 마치고 얼마 뒤, 형이 촬영을 위해 마르세유에 갔을 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너랑 여행하고 나서, 성당에 들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 한 문장은 프라하에서의 여행을 요약해 주는 말이었다.
. 우리는 서로의 속도와 취향을 조금씩 받아들였고, 함께 걸었던 시간이 형에게도 하나의 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동행하는 여행의 의미는, 나에게 있어 풍경보다 함께 남기는 작은 변화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지산이 형과의 프라하는 그런 의미에서 특별했다. 서로 다른 리듬으로 걸어도, 그 차이를 어색함이 아닌 여유로 받아들이게 해준 시간.
그래서 프라하는, 기대가 없었기에 더 크게 남았고, 함께였기에 더 오래 남게 된 도시가 되었다.
슬슬 형 얼굴도 다시 볼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