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새벽에 추워서 깼다. 비록 얇은 옷들이긴 하지만 다섯 겹이나 껴 입고 침낭 안에 들어갔는데도 춥다니 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눈을 못 봐서 실감 못 할 뿐.
일어나 바로 코코아를 타고 수프를 만들어 먹었다. 이틀 동안 캠핑을 하려니 몸이 더러워지는 기분이다. 배를 채우고 짐 정리를 하고 캠핑했던 장소를 나왔다. 푸카키 호수를 비지터 센터에서 다시 보고 화장실도 들려 갈까 하다가 그냥 방향을 돌려 데카포 호수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길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까지는 푸카키 호수를 바라보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근데 조만간 푸카키 호수가 사라지고 끝 모를 평원이 펼쳐졌는데 얕은 오르막 길이 계속 이어지는 데다가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니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이동거리는 늘지 않고 계속 같은 풍경만 쳐다보려니 좀이 쑤시는 기분이다. 아메리카의 넓은 대륙이나 호주의 사막은 도대체 어떻게 횡단할까. 그나마 자동차나 기차로 다니니까 지나갈 수 있는 거겠지.
한참 메말라 보이는 길을 지나 언제쯤 데카포 호수가 나오나 기다렸다. 한 25km 정도 달렸을까 호수는커녕 나무들이 몰려 있는 숲 조차도 안 보였다. 도대체 이 황량한 곳에 호수가 있긴 할까.
멀리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 보인다. 그래도 여전히 황량하기만 했는데 그 소나무들을 지나니 그렇게 황량해 보이던 곳에 아름다운 호수가 떡하니 나타나기 시작했다. 푸카키 호수가 약간 밝고 살짝 가벼워 보이는 밀키블루라면 대카포 호수는 깊은 푸른빛이 도는 밀키블루 색이었다. 그렇게 지루하던 길을 지나 드디어 고대하던 데카포 호수에 도착했다. 아름답긴 했으니 워낙 와나카에서 푹 쉬고 온 터라 생생한 감동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이 덜 한 건 아니다.
인포메이션을 들러 지도를 얻고는 가까운 홀리데이 파크로 이동했다. 아 오랜만에 따듯한 물에 샤워 좀 해 보겠네 하고 체크인을 하는데 기본 가격은 15불이고 샤워는 10분에 2불이었다. 남자인 나에게 넉넉한 시간이긴 한데 왜인지 돈 내고 샤워를 해야 된다는 거부감 때문에 그냥 세수와 머리만 감았다. 이상하게 애초에 17불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따로 시간제한을 두고 돈을 받으니 거부감이 들었다. 에라 이틀 더러워진 몸 하루 더 한다고 크게 달라지랴.
대강 씻고 텐트에서 옷을 갈아입고는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섰다. 데카포 마을의 분위기는 이제 조금씩 사람이 늘어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곳곳에 조금씩 공사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한적한 동네였다. 호수에 대한 유명세에 비하면 의외였다. 호숫길을 따라가다가 Church of the Good Shepherd를 보았다.
일전에 자전거 여행기 중에서 이곳 사진을 봤을 땐 신비로운 느낌이 들면서 아름다워 보이는 교회였는데 그분이 사진을 잘 찍은 것 같다. 막상 직접 보니 생각보다 작은 교회였다. 교회 주변에 생각보다 사람들이 없길래 희한하네라고 생각하고 사진을 찍으려는데 어떤 아줌마가 계속 뷰파인더를 안 벗어나신다. 뭔가 했더니 안에 결혼식 중이라고 촬영하지 말란다. 결혼식을 안에서 하는 거랑 밖에서 사진 찍는 거랑 무슨 상관인진 모르겠으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자리를 옮겼다. 배도 고픈김에 다시 마을로 가서 햄버거랑 커피로 배를 채웠다.
배를 채우고 잠시 호수가 보이는 곳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일기를 썼다. 여행하는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다니 기특하구나. 일기를 쓰다가 문득 교회 문을 닫으면 안으로 못 들어가 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교회를 찾아갔다.
여행기에서 봤던 유리창 앞의 십자가가 정면에 보인다. 그리고 그 유리창 밖으로 호수가 늘어서 있다. 십자가의 경건한 느낌과 뒤로 배경이 된 호수로 인해 조그만 교회 안을 가득 채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진을 찍고는 다시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데 불현듯 중국 관광객들이 여럿 몰려왔다. 손에는 대부분 DSLR을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다. 다들 한 장비 챙기셨다. 예전엔 전문가들만 쓰던 카메라였는데 이렇게 다들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잠시 주변을 더 보다가 자리를 옮겼다. 내일 오전 일찍 일어나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떠나야겠다.
교회를 뒤로 하고 슈퍼마켓에 가서 먹거리를 샀다. 이틀 캠핑을 했다고 그새 가방이 가벼워졌다. 쌀이랑 고기, 맥주, 수프, 빵, 바나나 등을 샀다.
장을 보고 캠핑장으로 돌아와 짐 정리를 좀 하고 자전거를 손봤다. 왼쪽 페달이 또 덜렁 거린다. 정녕 페달을 바꿔야 하는가. 시드니에 가면 자전거를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겠다.
저녁거리를 챙겨 키친으로 가서 밥을 하고 미역국과 고기랑 같이 먹었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맥주가 달다. 여러 개를 사면 가격이 저렴한데 무겁다 보니 비싼 돈 주고 하나씩밖에 못 먹는다. 감칠맛이 나서 더 맛있는 거겠거니.
주행거리: 48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