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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Mar 24. 2021

조직에서 인정받지 않을 용기

 10년 전쯤 ‘뉴스 후’라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제작한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기자는 6명이었는데, 6명이 한 주씩 돌아가며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전담해서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각자 6주 동안 프로그램 한 편을 제작해야 했는데, 마지막 한 주는 주로 편집을 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하고, 방송이 나간 다음 주에는 휴식이 필요했기에, 사실상 4주, 딱 한 달 동안 발제하고 기획해서 취재하고 원고까지 다 써야 하는 매우 빡빡한 여건이었다.

 기자들에게 특히 힘든 건 프로그램의 성격이었다. 사회 부조리를 캐서 집요하게 파고들어가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소재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파도 파도 비리가 끝없이 나오는 그야말로 진짜 나쁜 사람이거나, 오랜 시간 동안 각종 부조리가 켜켜이 쌓여온 고질적인 병폐여야 했다. 게다가 탐사 보도 프로그램으로는 드물게 최고 시청률이 20%에 육박할 정도로 시청자들의 호응이 컸고, 매달 기자협회나 방송기자연합회에서 주는 상을 휩쓸 정도로 신뢰도와 영향력도 대단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하는 기자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상당했다.

 특히 부담스러운 건 같은 프로그램을 매주 한 명씩 돌아가서 만들기 때문에 기자마다 각자의 성과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한 주 전에 다른 기자가 제작했을 때는 높은 시청률이 나왔는데, 내가 제작했을 때는 시청률이 반 토막이 나거나, 한 주 전에는 방송 이후 대단한 반향이 일었는데, 이번 주에는 별 반응 없이 잠잠한 경우,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맞닥뜨리게 되는 침묵 속에 가라앉은 어두운 사무실 분위기는 덤이었다.

 그래서 기자들은 대부분 한 방이 있는 것, 그래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들을 찾았다. 나 역시 좀 더 센 것, 좀 더 충격적인 소재를 찾기 위해 매번 몸부림을 치고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다. 누군가 나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냐”라고 물으면 “프로그램에 뼈와 살을 갈아 넣고 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당시 함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기자들 중에 유독 혼자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는 기자가 있었다. 나보다 1년 후배인 김지경 기자다. 그가 다루는 소재는 시청률이 높을 만한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만한 것도 아니었다. 철거민, 이주여성,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돼 있음에도, 새롭지 않고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기자들은 다루지 않는 소재들이었다.

 치열한 시청률 전쟁이 벌어지는 공중파 방송의 프라임타임에서 한 시간 동안 이렇게 인기 없는 소재를 다룬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회사 윗사람들은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아이템을 낼 때마다 쉽게 허락되지 않았고 계속 시간이 흐르다가 더 이상 끌면 방송이 펑크 날 때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허락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다른 기자들이 높은 시청률로 회사에서 주목받고, 떠들썩한 특종으로 기자상을 휩쓸 때에도 그는 조용히 한 길만 팠다. 소외받는 사람들의 인권 문제였다. 그렇게 그는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매번 꿋꿋하게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참 용기 있는 기자라고 생각했다. 기자도 한 조직의 일원이기에 조직 내에서 인정받는 건 중요한 문제이다. 조직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눈앞에 드러나는 성과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고, 취재거리를 찾을 때에도 그런 소재에 집중하게 된다. 그처럼 조직에서의 인정 여부에 휘둘리지 않고, 설사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않더라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두한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있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나는 그런 내 생각조차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해 연말, 그는 국제 엠네스티언론상을 수상했다. 큰 거 한 방을 노리며 취재에 몸을 불사르는 기자들도 쉽게 타지 못하는 의미 있는 상이었다. 주최 측의 시상 이유도 남달랐다. 대부분의 기자상이 특정 보도 하나를 지정해 상을 주는데 반해, 그에 대해선 그동안 그가 다뤘던 인권 관련 보도들을 모두 나열하며, 집요하게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문제를 제기해온 그의 행보를 치하했다. 소수자 인권을 위해 활동해온 많은 이들과 단체들이 그의 진정성을 인정했다. 빛나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온 그는 조직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는 인정받는 것을 포기한 기자가 아니라, 인정받으려 하지 않음으로써 인정받게 되는, 진짜 인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기자였던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여전히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에서 탐사 보도에 열중하고 있다. 그가 얼마 전 다시 성소수자 문제를 다뤘다. 성전환 후 군대에서 계속 국가를 위해 복무하기를 원했지만 끝내 거부당한 뒤 숨을 거둔 변희수 하사의 이야기와, 표를 얻기 위해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발언들을 노골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 그리고 10년 넘게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 문제를 심도 있게 취재해 보도했다.

 고정 팬이 많은 프로그램이라 그 가운데 이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더 나아가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을 수 있고, 시청률에 썩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음에도 그는 이번에도 묵묵히 꼭 해야 할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진심을 다해 프로그램에 꾹꾹 눌러 담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며 역시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 욕구는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기본 욕구 중에 가장 상위에 있는 것 중 하나가 인정 욕구라고 하니, 그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수도 없고, 무작정 버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중요한 건 그 욕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결국 인정받는 사람은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쫓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당장은 그가 별로 빛나지 않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알게 되고,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된 그에 대한 평판은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인정받지 않음으로써 인정받는 삶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MBC 김지경 기자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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