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선거를 앞두고 한 정치인의 거리유세를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여러 명의 선거운동원들이 따라다니며 그의 이름을 외치고 환호했다. 그는 선거운동원들을 거느린 채 인자한 얼굴로 거리에서 만나는 시민들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했다.
그런데 카메라가 꺼지고 나자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카메라 기자가 떠난 것을 확인한 그는 갑자기 자신을 따라다니던 운동원들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소리를 그 정도밖에 못내! 카메라 앞인데 더 크게 소리 질러야 할 거 아냐!”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잔뜩 못마땅한 얼굴을 한 그는 수행원이 열어준 차 문을 쾅 닫고는 사라졌다.
거리에 내동댕이쳐지듯 남겨진 운동원들은 그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가 평소에도 운동원들에게 자주 화를 내냐고 묻자 다들 곤란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취재일정에 쫓겨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내 그렇게 찝찝할 수가 없었다. 카메라 앞뒤가 완전히 딴판인 그의 모습을 영상에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카메라 앞, 뒤가 다른 사람을 만난 적도 있다. 프로야구단에 소속돼 있지만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투수들의 공을 받아주며 훈련을 돕는 불펜 포수를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한 번도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 없던 그가 인터뷰를 한다는 소식에 그와 오랜 시간 훈련을 함께 한 베테랑 투수가 지방의 한 고등학교 운동장까지 찾아왔다. 한때 뛰어난 실력으로 리그를 호령했던 장원삼 선수였다. 마운드에서 언제나 표정 변화 없는 굳은 얼굴로 묵묵히 공을 뿌렸던 그는 한겨울이었던 당시 몸을 만들기 위해 공을 던지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펜 포수를 빛내주기 위해 힘껏 공을 던져주었다. 투수가 준비되지 않은 시기에 많은 공을 던지면 자칫 다칠 우려가 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흘리며 수십 개의 공을 던졌다.
카메라가 꺼진 뒤의 모습은 더 인상적이었다. 스타플레이어로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그는 기꺼이 불펜 포수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며 촬영이 진행되는 긴 시간 동안 주변에 서서 불펜 포수를 기다려주었고, 촬영이 끝나자 밥을 사주겠다며 자신의 차에 태워 사라졌다. 평소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는 프로야구 경기에서 승부사의 모습만 보여주었던 그의 인간적이고 따뜻한 카메라 뒷모습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카메라에 비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얼마나 진실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 서면 더 좋은 사람으로,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이려 애를 쓴다. 그렇게 포장된 모습을 대중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평소 많은 연예인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는 예능 PD에게 이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연예인들 말이야, 진짜 모습은 어때?”
그 PD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화면에 보이는 그게 그 사람이야. 시청자들에게 진짜 모습을 한 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속일 수는 없어. 결국은 다 드러나게 돼있거든.”
TV에 출연해 얘기를 하고, 사람을 대하다 보면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보이려 해도 말투와 행동에서 자신의 평소 습관이 나오고, 그 느낌이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것이었다.
인성 좋은 후배 아나운서 한 명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화면에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면, 진짜 좋은 사람이 돼야 해요.”
오랜 방송 경험 속에서 나온 그의 이 말은 방송기자로, 그리고 뉴스 앵커로 시청자를 만나고 있는 내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좌우명이 되었다.
그럼 앞서 얘기한, 선거 운동원에게 화를 내던 정치인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몇 년 뒤 한 TV 시사프로그램에서 겉으로는 서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잇속을 챙기는 그의 실체가 낱낱이 파헤쳐졌다. 불펜 포수에게 진심을 다해주었던 장원삼 선수는 야구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선수들과 팬들 사이에서 인성 좋은 선수로 소문이 나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카메라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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