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무실 안에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고, 사무실 밖에는 밥 먹으러 오는 고양이들이 몇 있다.
상가 건물이라 앞을 지나는 손님들이 잦은데, 고양이들을 예뻐하며 말 걸어주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청소를 하거나 물을 갈아 주러 나가면 손님들이 말을 건넨다.
"고양이 어디 갔어요? 오늘은 안 보이네~"
그럼 나는 "오늘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밥 일찍 먹고 놀러 나갔어요" 하고 대답해 준다.
가끔은 고양이 먹이라며 편의점에서 참치캔을 사서 주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감사 인사를 하면, 오히려 "고양이들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가 되돌아온다.
따뜻한 세상이다.
오늘은 사무실에 출근했는데 문고리에 츄르가 놓여 있었다. '누가 놓고 갔지?'
바깥 고양이 중 하나가 요새 항생제를 먹고 있다. 츄르나 습식캔에 약을 가루 내서 섞어 주는데, 습식캔이 다 떨어져서 당장 먹일 게 하나도 없던 상황이었다.
신은 존재하는 게 맞다. 이 타이밍에 츄르를?
"누군지 모르는 이모,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고양이에게 약 탄 츄르를 먹이러 나갔는데 바닥에 엽서가 떨어져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누군지 모르는 이모는 아마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릴 때 친구 따라 기독교였고, '누구 집사님 딸, 누구 권사님 아들'의 작은 교회 문화에서 홀로 오래 버텨냈었던 아이였다. 신념도 없었고 믿음도 그리 없었고, 그냥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해주시던 좋은 말이 좋았다.
내 경우였지만, 제로에 가까운 신념과 흐릿한 믿음만 가지고는 교회생활이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수준의 무언가를 요구받는 분위기 속에서, 난 해낼 수 없겠다는 부담감이 괴로웠다. 결국 튕겨져 나왔고. 그 뒤로 쭈욱 십여 년간 무교로 살았다.
이십 대 후반의 어느 날, 참석한 모임에서 본인의 인생 책 추천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두 세 명정도가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이야기했다. 헤르만헤세를 그렇게 처음 접했다. 헤세의 책들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불교"에 관심이 생겼고, 나는 호기심이 생기면 원리부터 알아야 했기에 불교의 시작과 교리들을 가볍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정말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를 찬양하고 드높이는 문화가 아니라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
야나두였다.
나는 넷플릭스가 있기 전엔 일본 소설 보는 걸 좋아했고, 넷플릭스가 있고부터는 외국 드라마를 미친 듯이 본다. 영화보다 더 디테일한 드라마에서는 다양한 삶이 보인다. 오랜 기간 그 삶들을 보면서 문득 느꼈다. '무엇을 믿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사실 나는 종교인들의 전도가 마음에 들지 않고, 종교인들이 보여주는 이상 행동(모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도 인간이기에 그런 모순들이 분명 있을 거라 앞으로도 종교를 가질 일은 없겠지만, 어떤 종교든 그 교리는 선이고 빛이라고 생각한다.
손글씨로 쓴 엽서를 버리지 못하고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그 이모들이 결국 내게 전하고 싶었던 건 아마겟돈을 대비할 두꺼운 성경책이었겠지만, 정작 모두를 이롭게 한 건 고양이에게 먹일 츄르였다는 거.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 순간만큼은 우리에겐 부처였다.
결국 종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중요한 건 손가락 끝에 있는 달의 빛이다. 문고리에 걸려있던 츄르 한 봉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