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세 살 아이와 아빠는 장난감 포크레인 앞에 앉았다. 아빠가 리모컨을 작동하자 '위잉-' 소리가 나며 포크레인이 움직였다. 아이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으앙!... 무서워"
이어 아빠가 아이를 안아주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아니야. 이거 봐봐~ 무서운 거 아니야"
그리고는 포크레인이 무섭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아이를 안고 차분하게 설명하며 또 한 번 작동시켰다. 그러나 아이는 이번에도 "무서워..!" 라며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결국 아빠는 아이를 위해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무서워"라는 감정이 들어왔는데, "아니야. 이건 무서운 게 아니야" 라며 재빨리 다시 내보낸다. 그럼 무서운 게 아닌 게 된다.
미스터션샤인은 내 인생드라마지만, 언제나 21회까지 만이다. 22회부터는 울어야 되니까.
슬픈 장면을 보고 눈물이 터져 나올 때 눈물을 멈추게 하는 나만의 비법이 있다. "저 배우 실제로는 살아있어"라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그럼 "맞아 이건 드라마이고 저 배우는 안 죽어!" 안도하며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얼른 빠져나올 수 있다.
그 비법의 시작은 고등학생-대학생 무렵부터였다. 그땐 친구들과 그렇게 영화관에 자주 갔다. 보통 약속 시간에 상영하는 영화를 고르게 되는데 무슨 내용인 줄도 모른 채 보다가 눈물을 펑펑 쏟을 때가 있었다. 영화관에서는 큰소리 내며 울 수도 없고 눈물 닦고 코를 풀 휴지도 무한정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마음껏 울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눈을 감고 영화에서 빠져나오는 게 답이었다. '저 배우 어제 예능에 나왔어. 안 죽어.'
상영시간 내내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꾹 참아내며, 작고 길게 내쉰 깊은숨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조명이 켜질 때, 친구들에게 보이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창피했다.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느라 찬물로 손을 닦아 얼굴에 갖다 대고, 얼음만 남아있는 콜라컵을 얼굴에 대는 일들이 싫었다.
20대의 연애에 나는 거의 이별통보를 받는 쪽이었다. 몇 번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매번 힘든 일이고, 반복된다고 나아지지도 않는다. 이별의 이유라도 알고 싶지만 대부분은 상대가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해주는 피드백 같은 건 없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착하고 매너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너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우린 안 맞는 것 같아" 뭐가 안 맞는지는 없다. 대충 짐작은 하지만 확실하게 듣고 싶다. 어차피 받은 상처 답답함이라도 해소하게.
이렇게 당한 이별은 내내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고 슬프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슬픔의 악취에 질식된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나는 이내 "남자친구는 죽었어. 그러니 더 이상 연락도 할 수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잖아. 어쩔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슬픈 거야"라고 나를 속인다. 이 방법은 꽤 잘 통한다. 매번 통했으니.
그리고 나서는 약으로 시간을 먹는다.
골든리트리버 도리는 덩치만 크고 겁쟁이다. 바람에 현수막만 펄럭여도 짖고 도망친다.
도리가 거실에 앉아있다가 잠시 뒤 헥헥거리며 일어났다가를 반복한다. 어딘가 불편하다는 이야기이다. 생각해 보니 아침에 눈뜨자마자 쉬하러 마당에 나가야 하는데 어젯밤부터 내리는 비와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밤새 대소변을 참고 있었다. 도리와 해리는 실외배변견이다. 이렇게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는 비가 싫고 바람이 무서워서 그냥 소변을 참고 만다. 하지만 이제는 나가야 한다.
우비를 챙겨 입혀서 목줄을 하고 마당에 나간다. 어쩔 수 없지만 도리도 (끌려) 나간다.
"우리 도리 바람이 불어서 무서웠구나. 안 무섭도록 누나가 옆에 있어 줄게 괜찮아"라고 말하며, 볼일 보는 내내 옆에 서서 비바람을 막아 준다. 오랜 시간 외출하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누나가 오늘 오래 같이 못 있어줘서 미안해. 너무 심심했지?"하고 해리를 꼭 껴안으며 이야기해 준다.
나를 돌아봤다. 나도 저 아이의 아빠처럼 도리와 해리를 대하고 있을까? 분명 아니었다. 이 친구들의 마음을 읽어주고 부정적인 상황과 감정을 공감하고 그걸 말로 표현까지 해주고 있었다. 뭐지 그럼?
나와 타인의 감정에는 그렇게도 냉정한데, 도리 해리에게는 이토록 따뜻한 보호자였을 줄이야. 조금 충격이었다.
TV속 세 살 아이는 나였고, 아이의 아빠도 나였다.
아빠는 세 살 아이가 느끼고 표현했던 "무서워"라는 감정을 감정으로 처리하지 않고, 데이터로 처리했다.
아이의 감정은 그렇게 데이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진짜 사라진 걸까?
에너지의 총량은 보존되는 건데, 어디에도 닿지 못한 아이의 감정은 어떤 에너지가 되어 남았을까.
TV는 계속 틀어져 있는데, 거실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