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개관 - 아이의 자존감, 그것은 가장 큰 무기다.

by 미네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


오늘 혹시 아이에게 이 말을 하지 않았나? 나는 주로 '이놈의 새끼'(여러분, 죄송합니다.)를 사용한다. 아하하하.

아들이 등교하는 아침, 일어나라는 말에 온몸을 비틀다가 스쿨버스 안 타고 엄마랑 학교까지 걸어갈 거면 계속 누워있으라는 말에 부리나케 일어난다. 사실 그렇다. 역시 나도 그런 엄마다. 아하하하.


이스탄불에 온 후, 알레르기 약을 매일 먹는 아들을 보며 가끔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지만, 내가 힘들어도 아들과 함께 걸어서 친구의 집에 가거나 둘이서 구경을 갈 곳이 있으면 주로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한다. 아들과 약속을 했다면 '내가 몸이 힘들어도 지킨다'가 원칙이다.

아직 아이와 이곳에서 2년을 더 살아야 하고 이제 아이는 혼자 잘 걸을 만큼 제법 컸으며, 내가 한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후, 운전을 하면 평온한 마음이 아니라 여전히 긴장한다는 것을 느끼곤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되도록 운전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에 가서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기에(고학년이 될수록, 학교생활에서 아이가 혼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진다.) 어쩌면 이제 제법 나이를 먹은 아들이 혼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내리는 것에 익숙한 것이 여러모로 그의 삶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잡한 이스탄불에서 마스크를 쓴 아들을 데리고 택시가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사서 고생을 한다고 걱정을 한다. 하지만 나는 아들이 이곳에서 다양한 것을 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때론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기다려야만 하고 순서도 없고, 이것을 어기는 사람도 있으며 때론 불편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는 나한테 혼도 난다. 엉망진창이다. 아하하하.

미리 약을 먹이고 아들이 그동안 많이 먹고 싶어 하던 음식을 주기도 하고, 불안을 안고 친구들과 플레이 데이트를 하고, 약을 쓰며 수영을 시키는 것도 이러한 삶의 일부다.


어떠한 일에 무던해지는 것, 자식에 대해선 무던해지지 않는 나의 마음을 숨기는 것. 평온한 척 가끔 그렇게, 급해지고 화가 나는 마음을 숨기는 것이 부모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는, 사실 사서 고생을 하는 편이다. 아들이 그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가 없다면 양해를 구하고 그저 놓아두는 편이다.

예전의 삶이 외롭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없는 그 놀이터 한 구석에서 지구의 핵을 보겠다며 한없이 땅을 파던 아들과 단 둘이 오롯이 있던 그 순간은, 한편으로 참 편했다. 아무런 제한도 그 누구의 시선도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들이 가득한 교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과 4월. 부모님들의 예상과 달리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싸운다. 신학기의 어색함이 여전한 교실에서 여러 초등학교에서 온 친구들은 중학교 한 교실에 모여있다. 예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좋으련만, 그렇다. 그 짧은 쉬는 시간에 누군가와 싸웠는지 아이의 얼굴이 붉어져 있다. 다친 친구도 있고 때린 친구도 있지만, 그 누구도 이겼다는 기쁨이 없다. 그렇게 누군가는 누군가를 때렸다.


안타깝게도 아이들 사이에도 먹이사슬이 있다. 누군가는 공부도 잘하고, 누군가는 싸움을 잘하고, 그 누군가는 집도 잘 살고 잘생기고 인기가 있다. 다들 중학생이 되면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판단한다.

실제로 내가 근무하던 시절, 한 친구가 LH아파트에 산다며 '거지'라고 놀리는 것을 듣기도 했다. 자신은 메이커 아파트에 산다며 말하는데, 내가 '너희 집 아파트에 대출은 얼마인지 아냐?'는 내 질문에 대출이 뭐냐고 되묻는 경우도 있었다.(사실, 학부모에게 민원을 받을 작정을 하고, 독설을 날렸다.)

그렇다. 애는 애다. 아하하하. 그저 어른들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의미 없이 내뱉는 어린애다. 중학생도 그런다. 이렇듯 교실 상황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한다. 그리고 이런 아이의 약한 마음을 노리는 친구는 가끔 존재한다.


"너, 쟤랑 싸우면 못 이기지?"


그럼, 안타깝게도 대다수 녀석들은 그 비교대상이 된 저 아이와 쉬는 시간에 전혀 싸울 일이 없건만 싸운다. 그 친구보다 자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 다른 아이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아무런 의미 없는 싸움에 말려든다. 그리고 어느 하나 이긴 사람 없는 교실에 나는 나타난다. 엉망이다. 교실과 그 아이들의 마음까지 모두 엉망이다.


나는 그렇게 화장실도 못 가고, 쉬는 시간마다 학기 초의 그 교실에 가 있었다. 선배 교사였던 나의 선생님이 내게 어쩌면 한 달만 고생하면, 그 어려움이 끝날 거라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마치, 백일만 지나면 아이가 통잠을 잘 거라는 기대에 꼭 안고 아이의 통잠을 기다리던 신생아를 가진 엄마처럼 그것을 믿고, 그때의 나도 그렇게 교실에서 매번 오는 쉬는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누군가를 때렸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그 누군가도 나의 아이를 때렸다는 것을 일부 전제한다. 학교 폭력이 신문에 연일 오르내리는 이때, 어떤 사람들은 자식에게 너도 싸우라고, 강해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어떤 싸움도 시작하는 순간, 온전히 100%의 승리는 없다. 그저 그 순간의 감정일 뿐, 학교에서 교사로서 본 아이들의 싸움의 결과에서, 사실 어느 누구의 완벽한 승리는 없다. 그 사람이 나빠서, 맞을 만한 행동을 했다는 것은 학교라는 공간, 사회라는 공간에선 용납될 수 없다. 교사로서 두 아이의 중재만 가능할 뿐, 그 누구의 편에 설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꼭 쟤랑 싸워서 이겨야 하나, '그냥 네가 이겼다.'라고 말하라고 가르치지만 학교에서 그런 감정 조절이 가능한 친구는 참으로 드물다. 그런 싸움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나를 선택하는 아이는 드물다.

가장 소중한 자신을 지키는 대신, 그 싸움의 감정 속에 파묻혀,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해서 자신을 소모시킨다.

어쩌면 한창 유행한 '더 글로리' 속의 복수가 상쾌하기보다 슬픈 것은 그것 때문이다.


물론 한 명을 두고, 여러 명이서 따돌리거나 싸우는 일은 한 명이 견디기에 무척 힘든 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명을 왕따 시키는 그 아이들 중 일부는 자신 또한 왕따가 되지 않으려는 불안감에 누군가를 소외시킨다. 그 아이가 아니면 나 자신이 소외될 거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주류에 끼고 싶은 마음, 내가 그 속에 있어야 안전하다는 마음, 사실 이런 마음 때문에 어린 아이들은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힘들어한다. 그 안에 들어가서 자신이 우월한 그룹에 속해있다는 소속감, 그것을 위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리석게도, 그 행동을 한다.



중등학교에 이르면, 부모님들은 교사에게 와서 아이의 성적에 대해 묻지만, 대다수 아이들은 나에게 공부를 묻지 않는다. 오히려 주로 친구 관계나 연애 상담이다. 그리고 성적이 좋지만 우울증 약을 먹는 친구들이나 분노 장애가 있는 친구들도 대다수 원인은 학업이 아니다. 부모님과의 관계 또는 친구의 관계, 자아개념의 불안 등 심리적인 원인이 가장 크다.

특히 타인과 비교를 통해, 자아가 성숙하는 청소년 시절이라, 설사 공부를 아주 잘하더라도 운동이나 외모 등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끊임없이 비교를 시작하고 이것에 고통을 받는다.


내가 근무하던 시절, 그 여학생의 여드름이 내 눈에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데, 그 녀석의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 '너 얼굴에 여드름 터졌다.' 이 한 마디에 죽일 듯한 눈빛으로 수업시간 중에 그 친구를 향해 고함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평소 마음의 상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업 시간에 미친 듯이 울면서 책을 던지면, 교사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고함치는 학생을 혼낼 수밖에 없다.

아이의 마음과 상처를 그 교실의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다른 누군가에겐 아무렇지 않을, 그 여드름 한 부분이 자신에겐 지금 가장 힘든 슬픔의 한 부분인 것이다.


아이들은 참으로 외롭다.


마치 엄마가 아이가 클수록, 그 아이의 생활을 조금씩 놓치고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이는 아주 자연스럽다. 아이가 지금 무엇 때문에 힘든지 부모는, 교사는 온전히 알 수 없다.

오랜 시간 외국 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에 돌아온 친구들이 힘든 이유는 부모들이 생각하듯, 다른 교육 환경이나 성적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불안이다. 그 막연함에서 시작된다.



학년을 올라갈수록 시험에 강하고 성적이 좋은 친구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특징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다. 즉,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태풍이 불어도 그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 주변을 신경쓰지 않는다. 아하하하.

설사 지난번 나의 글인 '이스탄불이라고 다를 건 없다'

https://brunch.co.kr/@fortoy1128/142

설명의 중간고사가 망했다 하더라도 그런 친구는 다음 단계를 위한 계획을 짠다. 그리고 평온하게 마음을 먹고,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파악한다.


학교에 있을 때, 수능을 치고 나를 찾아온 아이 중에 중학교 학업 성적은 우수하지 않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성격이 무척 좋으셨다. 그리고 아이의 성적에 따라 어깨를 펴는 다른 부모들과 달리, 학교의 굳은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역시나 엄마처럼, 친구들과 교우관계가 좋은 그 학생은 '학생회 활동'을 통해 좋은 대학에 수시전형으로 진학했다. 물론 좋은 대학교에는 최저 수능 등급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 공부에 대한 대비도 언제나 함께 했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교내 활동뿐 아니라 교외의 다양한 활동에, 학생으로서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셨다고 이야기 하셨다.(각 학교의 입시자료를 살펴보면 '수능의 과목 중, 세 과목의 영역 합계가 6등급 이하여야 한다.'식으로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렇듯 중학교 시험을 몇 번 못 쳤다고 대학이 모두 결정되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심각하게 먼 미래를, 아이의 진로를 미리 걱정하지 않으시길 바란다.(물론 나도 걱정은 한다. 아하하하.)

물론, 자신의 아이를 특수 목적고(과학고, 외국어고, 과학특성화고)등을 준비한다면 중학교 입시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며,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시험은 참으로 중요해진다.




지금 우리 아이의 발달 단계는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이가 풀고 있는 수학 문제집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 돌아봐야 한다. 교과서는 제대로 보고 있는지, 다른 아이의 진도와 과정이 아니라 내 아이의 속도와 마음에 우린 집중해야 한다.


내가 쫓기는 마음을 아이는 이미 알고 있다.


가끔 실수를 해야 하는 나이의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이보다 무얼 못하는 지보다 우리 아이가 무얼 잘하는 지를 분명히 아는 것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입시가 변화하고 복잡해질수록 부모의 정보력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가 무엇을 제일 잘하는 지를 모르고, 혹시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좋다는 정보의 문제집으로 아이의 문제집을 바꾸고 풀고 있진 않은지에 대해 먼저 집중해야 한다.


지금, 우리 아이는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이와 시작한 그 문제집을 끝까지 풀고 있는가? 못하는 문제를 별표를 크게 하곤, 때론 우리는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 그 문제를 못 풀면 어떤가, 사실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나의 글을 읽은 당신이, 지금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다시 말할 수 있는가? 앵무새처럼, 당신은 다시 그대로 말할 수 없다. 당신은 나의 아이가 모든 공부 내용을 앵무새처럼 다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아이는 자신의 말로 그 공부를 바꾸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암기력보다 중요한 것은 사고력과 자존감이다. 아이는 자신의 말로 공부한 내용을 바꾸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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