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5년11월 엄마가 쓰러졌다.

by 만두고냥

이 글은 엄마가 쓰러지고 약 일주일간의 기록이다.


노년의 부모님을 모시고 산지 약 5년. 자식이라고는 외동딸인 나 하나.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 있도록 자처해서 데릴사위 노릇을 해주고있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는 결혼직후 직장때문에 한동안 서울 잠실에서 살다가 부모님이 계신 경기도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에게 엄마와 아빠와 함께할 수 있는 5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었으니까...유년기 시절에 나는 살가운 딸도 아니었고, 소힘줄처럼 끈질기게 말도 안 듣는 엉망진창인 딸이었지만, 성인이 되고 해외에서 거주하고 일하는 시간이 10년 이상 지속되면서 한국에 다녀갈때마다 부모님, 특히 엄마와의 애틋함은 깊어졌었다. 홍콩에서 6년여의 직장생활을 접고 한국에 들어온 것도 엄마가 더 고령의 아빠를 케어하는게 너무 힘들어서였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와서도 바삐 해외출장을 다니며 직장생활을 해야하는 팔자인지라 아빠를 케어하는 것에 물리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진 못할지언정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마음을 공감해주고, 가끔 주말에 놀러가고, 엄마랑 여행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많이 활발해졌고, 심적으로도 안정을 많이 찾아갔다. 사내대장부같이 모든 일을 계획있게 진행하던 똑순이같던 우리엄마도 나이가 들어가며 딸인 나에게 의지하는 일들이 많아졌고...그렇게 엄마와 보낼 시간이 천년만년 남아있을 줄 알았건만.


2025년 11월12일 아침 7시20분.

화장실에서 쓰러진 엄마를 발견한 시각이다.

같이 살고있으니 아침마다 엄마방(아빠와 엄마는 40년째 각방을 쓰셨다)화장실에서 샤워를하고 화장을 하는지라 그 날도 어느날과 다름없이 알람소리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려고했다. 다만, 그 날은 이미 아침 7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주방이 너무 조용했다. 평소라면 새벽5시부터 일어나서 뚝딱거리며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야 했는데 그 날은 묘하게도 공기마저 아주 조용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주방에서 물을 한 잔 마시고, 엄마를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음, 어제 저녁에 피곤해보이더니 아직 잠들어 계신건가? 라는 생각으로 엄마방에 들어선 순간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엄마는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처음엔 너무 현실적이지가 않아서 평소 장난기가 많은 엄마인지라 장난을 치고있는 줄 알았다. 부리나케 엄마를 흔들어서 깨워봤는데 이미 입에 거품을 물고있었고, 눈도 뜨지않은채 손과발을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이건 뭔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장면을 마주하고나니 이성이 돌아오지않았다.

바보같은 나는 119를 부를 생각도 못하고 속절없이 엄마를 흔들어깨우며 시간만 지체하고 있었다.

그 전날 몸이 좋지않았던 남편이(다행히 연차를 내고 출근을 하지 않았던지라 집에 있었다)아직 잠들어 있었는데, 부리나케 우리방으로 달려가 남편을 깨웠다.

" 엄마 쓰러졌어!!!"

남편도 총알처럼 방으로 달려와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엄마를 무릎에 눕혀두고 나에게 계속 소리를 질렀다.

"정신차려! 빨리 119에 전화해 빨리!!!"

아, 맞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를 흔들어 깨울 것이 아니라 구급차를 불렀어야지. 병신병신.

머릿속에서 익숙한 단어조차 와해되는 느낌이어서 119 구급대원에게 엄마의 상태를 말하기가 어려워하니남편이 전화를 뺏어받아서 침착하게 상태를 설명했고, 불과 5분도 안되어서 구급대원이 도착했다.

그때까지 엄마는 계속 거품을 물고, 손발을 떨고 눈 한 번 뜨지 못했다.


집근처 3개의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이송을 거부당하고(이때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있었다), 수원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겨우 이송 허가를 받았다. 하필 출근시간이라 길은 왜 이렇게 막히는 것인지...사이렌 틀었는데도 왜 길을 안비켜주는거야...대상없는 분노가 계속 치밀어올랐다. 그 와중에도 구급차 안에서 엄마의 생명줄을 붙잡기위한 조취들은 계속 취해지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 병원 응급실에는 보호자가 1명 밖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다시 한 번 무너져내렸다.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데...


엄마는 급하게 격리실로 들어갔고 침상에는 빨간색 FAST딱지가 붙었다.

거의 100%의 확률로 뇌의 문제일 것이니 급하게 CT를 찍겠다고 했다. 촬영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서있지도 앉아있지도 못하면서 보호자 대기실을 미친사람처럼 서성거렸다. CT결과는 10분도 안 걸려서 나왔던 것 같다. 신경외과 의사가 내려와서 엄마의 상태를 설명해줬다. 응급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응급의에게 위급, 사망등과 같이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나와는 거리가 멀 것이라 생각했던 비현실적인 단어들이 쏟아져 들어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어졌었다. 신경외과 의사는 응급의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딱딱한 말투로 엄마 수술 동의서에 싸인을 하라고 했다. 병명은 기저핵, 뇌실내 출혈, 이미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어 뇌실속에 피가 꽉 찼고, 출혈량은 너무 커서 수두증이라는 합병증도 동반된 상태였다. 수술하다가 사망할수도, 수술을 해도 온전한 삶은 찾지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때 왜 하필 나는 그런 머저리 같은 질문을 했을까?

"싸인 안하면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수술은 급하게 이루어졌다. 3층 수술실 앞까지 보호자 동반하에 엄마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머리를 여는 수술은 아닌지라 1시간남짓 걸릴거라고 했고, 어차피 수술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수술 끝나고 보호자에게 고지를 해주겠다고 했다. 엄마를 수술실로 들여보내고 처음으로 남편 얼굴을 마주했다.

남편 얼굴을 보니 바보천치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둘다 별다른 말을 하지못했고, 1시간쯤 흘러 수술이 끝났으니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하라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중환자실 소파에 앉아서 머리를 쳐박고 울고있다보니, 환자용 엘레베이터가 열리고 수술을 마친 엄마가 침상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풍성한 흰머리를 가지고싶어했던 80의 내 늙은 노모는 수술 후 생경한 빡빡머리를 하고 콧줄을 끼고, 머리에도 2개의 줄을, 그 밖에 알 수없는 각종 관과 줄을 끼우고있어 엄마같지가 않았다. 그 모습은 너무 무섭고 너무 낯설었다. 80세에도 늘 본인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했던 소녀같던 엄마의 모습은 너무 처참했고 불쌍했다.


중환자실 앞, 차가운 복도에서 더욱 차갑고 차분하게 엄마의 상태를 설명해주는 주치의의 이야기는 사실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응급실에서 들은 말과 거의 동일했던 걸로 기억한다) 날카로운 단어들만 귀에 박혀서 그 몇 개의 단어가 가지는 잔인함에 또 마음이 무너졌다. 옆에서 듣고있던 남편 역시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있지않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첫 날, 중환자실 10분의 면회를 눈물로 마무리했다. 담당 간호사선생님이 엄마가 이야기를 듣고있을 수 있으니 좋은 말을 많이 해주라고 했지만 그게 쉽지않았다. 낯선 엄마를 쓰다듬기도 무서워서 바보같이 눈물을 쏟으며 손만 덜덜 떨다 나왔다.


엄마 핸드폰이 울릴때마다 지인들에게 엄마 소식을 전하고, 주위 친척들에게 엄마 소식을 전했다.

다들 똑같은 말을 했고, 그 중에서 당장의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지병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사람이!!"

그래, 생각해보면 엄마는 80평생 병원 중환자실이라고는 가본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집에는 더 고령인 87세의 아빠가 있었다. 더군다나 아빠도 그 주 월요일에 뇌경색 재활을 마치고 갓 병원에서 퇴원한 터였다. 엄마를 구급차에 태워 정신없이 병원으로 갔던 우리는 아빠를 신경쓸 사이가 없었다. 정신이 빠져버린 나를 대신해 남편이 엄마의 상태를 아빠에게 전했지만, 파킨슨병과 뇌경색을 같이 앓고 이미 인지능력이 많이 떨어진 그는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있는 듯 했다. 문득, 아빠가 원망스럽기도했다. 그 주 주말 토요일, 일요일 이틀내내 엄마가 그 좁은 병실 간병인 침대에 누워서 아빠를 간호했었다. 아빠는 그렇게 정신이 온전했는데 왜 그 주말을 엄마가 내내 붙어서 간호하게했나, 나와 남편도 원망해봤다. 엄마를 보내는게 아니었는데, 그깟 일이 뭐라고 몇 일 쉬고 회사에서 짤리더라도 아빠는 우리가 간호했어야했는데...그게 너무 스트레스고 힘들어서 엄마가 쓰러진 것은 아닐까...뒤늦은 통탄과 후회가 과연 무슨 도움이 될까...?


중환자실 10분남짓 면회를 마치고 남편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웃기게도 아빠의 끼니가 걱정되었다. 아빠에게 전화해서 국수 한그릇을 먹고 집으로 가자고, 우리가 지금 병원에 있어봐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이야기하고, 평소 가족들끼리 갔던 동네 칼국수집을 갔다. 늘 4명이었고, 밥을 먹으러가던 식당에서도 대장처럼 진두지휘하고 깔끔함이 지나쳐 식당 수저와 젓가락을 물에 씻던 엄마가 떠올랐다. 각각 국수와 국밥을 시켰지만 반도 먹지못하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먹고살겠다고 밥은 먹고있는 내가 싫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급하게 나가느라 어질러진 집과 엄마가 쓰러졌던 화장실을 보고 나는 또 무너졌다. 울음을 참을 수 없어서 5살 애가 울듯 목놓아 울고나니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했고, 현실적인 생각을 조금은 할 수 있었다. 더 고령의 아빠...의식을 회복해도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엄마...

하지만 나와 남편은 어떻게든 일상으로 복귀해야했고, 경제활동을 멈출 수 없었다. 우리부부의 삶도 무너진다면 그 또한 부모님에게 불효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그 삶이 무너진 이후의 나는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정도로 피폐해질 것이 뻔했다.

엄마가 쓰러진 첫째날이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냉정해졌다.


둘째날부터 정신을 다잡고 엄마 면회부터 긍정적으로 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쏟아지는 눈물은 멈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걱정하지 않게 내가 곁에 있음을, 내가 모든 가족을 챙길 것임을 다짐하고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편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상조회사와 엄마가 평소에 이야기했던 수목장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차분하게 나를 위로해왔다. 평소 연명치료에 대해 엄마랑 이야기해두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상황이 닥쳐 회복예후가 좋지않다면, 더 이상 연명치료를 하지않고 편하게 엄마를 보내주기로 아빠와 남편과 엄마의 현재 유일한 혈족인 미국의 이모와도 의견을 일치시켜두었다. 부모의 죽음은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며, 언젠가 닥칠 일이이라는 것을 스스로 계속 각인시키며 내 자신을 다독였다.


아빠가 노후에 조금이라도 자금을 아낄 수 있도록 장기요양보험도 신청해두고,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알아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알아보면서 정신없이 2~3일을 보냈더니 엄마의 상황을 조금은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밤이면 찾아오는 불안감과 슬픔, 울리는 전화벨소리(그렇다고 무음으로 해둘 수는 없었다)에 심장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음은 여전했다.


그리고 더 고령이었던 아빠는 엄마가 그렇게 된 것에 분명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있었다.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잘 듣지도 못하고, 이해력도 많이 저하된 아빠는 둘째날부터 본인의 신변을 자꾸 정리하려고했다. 통장의 잔고, 집문서, 약간의 폐물도 처분하기를 바라며 인생을 정리하고싶은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일들을 도우면서도 아빠의 삼시세끼 식사를 챙겨여하고, 빨래도 해야하고, 분리수거도 해야하고...산재된 가사일이 참 많았다. 그동안 엄마가 이런 일들을(많은 툴툴거림이 있었을지언정)막힘없이 해냈던 것을 생각해봤다. 하지만 회사에서 배려해준 데드라인은 10일 남짓...나도 이 이상은 회사와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않았다. 더군다나 연말은 사업계획과 리뷰로 가장 바쁜 시기고, 12월 약 2주간의 해외출장도 목전이었다.


나는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봤다. 과연 내가 회사생활을 하면서 출장을 다니면서 아빠를 케어할 수 있는가? 내가 아빠를 온전하게 케어하기위해서는 무조건 회사를 그만두고 24시간 붙어있어야했다. 그즈음, 아빠는 정신까지 약해져서 신체에도 영향을 받아 하루에 한 번꼴로 넘어졌다. 우리 부부도 영양가있는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은 피차일반이었지만, 그건 아빠도 마찬가지였던지라 건강이 더욱 걱정되기 시작했다.


4일차부터는 요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24시간 누군가가 케어해주고, 삼시세끼 영양가있는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아빠가 혼자 지내서 우울함이 가중되지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예상대로 아빠는 반발이 심했다. 그 나이대 어른들이 으레 요양원은 부모를 버리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더군다나 토요일에는 아빠가 엄마를 면회하고 싶어했다. 아빠가 받을 충격이 걱정되서 엄마가 어느정도 회복하기전까지는 얼굴을 보여주고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이 보고싶다는 남편의 그리움을 자식이 어떻게 막겠는가...?

엄마를 면회한 후 아빠는 진짜 아기처럼 울었다. 본인 부모님이 돌아가셨을때도 내 어린기억에 아빠가 저토록 서럽게 울진않았었다. 나약해진 아빠가 그동안 엄마를 본인의 엄마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면서도 약간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 날 엄마를 본 후 아빠는 더 초라해지고 나약해졌다. 집에서 울거나 멍때리는 시간이 길어졌고, 식욕도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에 화가났다. 내가 예상했던 일정보다 아빠를 더 빨리 요양원에 보내고 싶어져서 회사에서 보고서 쓰듯이 리서치에 열중했다. 남편도 도와주며 일요일은 같이 3곳의 요양원을 둘러보았다. 가장 햇살이 잘 들고, 어르신들의 표정이 밝았던, 하지만 비용부담은 상당했던 곳으로 마음결정을 했고, 아빠에게 이 사실을 숨김없이 말해줬다.

요양원 이야기가 처음 언급되었을때 아빠는 혼자 집에서 해보겠다고 했다. 우리가 출근하더라도 퇴근해서 집에 오기 전까지 자신이 스스로를 돌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조금도 신뢰할 수 없었고 오히려 마음이 불안했다. 이기적이고 못된 자식이더라도 아빠에게 나를 생각해서라도 갈 수 없겠냐고 설득했다. 내가 일상으로 돌아가야지만,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리라...게다가 엄마의 상태에 따라 전원하여 장기간의 재활간병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나는 아빠를 돌볼 수가 없었고, 그럴 자격도 없었다. 아빠는 계속 울었다. 받아들인다고는 했지만 눈빛에서 두려움과 버러졌다는 슬픔과 설움이 가득했다. 나는 이를 애써 무시하며 바로 이틀 후에 아빠의 입소를 결정했다.


엄마가 쓰러진지 5일차만에 아빠의 입소를 앞두고 짐들을 정리했다. 생각보다 물건이 별로 없었고, 좋은 것도 가지고있지않았다. 가방안에 가득 들어있는 휴지와 찢어진 수건조각같은 비루한 물건들이 튀어나와 슬픔과 짜증이 뒤석인채 아빠 짐을 챙겨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의 나는 엄마의 상황에 대한 원망을 모조리 아빠에게 퍼붓고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