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숲 속 마을 한가운데, 바람이 살랑이는 작은 언덕 위에 토끼 한 마리가 살고 있었어요. 이름은 하얀솜. 눈처럼 하얀 털과 분홍빛 작은 코를 가진, 마치 솜사탕처럼 포근한 인상의 토끼였답니다.
하얀솜은 상상하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그의 방 안에는 삐뚤삐뚤 그린 그림과 반쯤 쓰다만 이야기 노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요.
"오늘은 뭘 상상해 볼까?"
창가에 턱을 괴고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하얀솜의 일상이었어요. 상상 속에서 하얀솜은 탐험가도 되고, 영웅도 되고, 해적도 되었어요. 그렇게 만든 이야기들은 친구들이 아주 좋아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숲 속 학교 부엉이 선생님이 모든 동물 친구들에게 안내를 해주었어요.
"얘들아, 다음 주에 숲 속 창작 대회가 열린단다. 너희가 만든 특별한 이야기를 마음껏 들려주렴."
하얀솜의 귀가 쫑긋 섰어요. 오랫동안 꿈꿔왔던 기회였지요. 흥분되는 마음을 안고 하얀 종이 위에 펜을 놓았지만, 머릿속은 하얘지고 말았어요. 수많은 이야기가 떠올라도 글로 정리하는 건 어려웠어요.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쓰지 못한 하얀솜은 초조한 마음에 인터넷을 켰어요. 그리고 다람쥐 '도토리'가 쓴 모험 이야기를 발견했죠.
"이 이야기 정말 재밌다. 조금만 바꾸면... 괜찮겠지?"
하얀솜은 그 글을 고치기 시작했어요. 배경과 인물을 바꿔서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꾸몄어요.
대회가 열리고 하얀솜의 이야기는 큰 박수를 받았어요.
"하얀솜, 정말 대단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해 냈어?"
하얀솜은 당당히 1등을 차지했고, 은색 깃털 펜과 원고 노트를 선물로 받았어요. 마음 한편이 찜찜했지만, 하얀솜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삼켰어요.
'이번 한 번쯤은 괜찮겠지. 다음엔 진짜 내 이야기를 쓸 거야.'
하얀솜의 위태로운 모험은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2.
대회 이후, 하얀솜은 숲 속의 작은 스타가 되었어요. 학교 게시판에는 하얀솜의 수상 사진이 붙었고, 작은 팬클럽까지 생겼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출판사를 운영하는 비버 씨가 찾아왔어요.
"하얀솜 작가님, 작가님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어요. 계약조건도 만족하실 거예요. 다만, 분량을 조금 늘리면 좋겠어요."
계약의 기쁨도 잠시, 하얀솜은 또다시 창작의 벽에 부딪혔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답니다.
결국 하얀솜은 다시 인터넷 속 이야기들을 뒤적였어요. 여러 작가들의 글에서 필요한 부분을 모아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어요.
'그냥 참고한 것뿐이야. 완전히 베낀 건 아니잖아. 창작이란 원래 영감을 주고받는 거니깐."
책은 대성공을 거뒀어요. 서점에는 '하얀솜 코너'가 생겼고, 팬레터가 매일같이 쏟아졌어요. 출판사에서는 벌써 다음 책을 기획했지요.
하얀솜의 이야기를 찾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고, 하얀솜은 소설, 시, 노래가사까지 다른 이들의 작품을 조금씩 바꿔 자기 이름으로 공개를 했어요.
'그냥 더 좋게 다듬는 작업이야. 이것도 나만의 방식이야.'
하얀솜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을 읊조렸어요. 겉으로는 빛나는 작가였지만, 하얀솜의 마음엔 불안감만 커져가고 있었죠.
3.
시간이 흐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황금 깃털상'대회가 열렸어요. 하얀솜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글을 살짝 바꿔서 대회에 출품했어요. 남극 작가 얼음별의 이야기였지요.
'멀리 있고, 나보다 덜 유명한 작가니깐 괜찮아. 이건 나만의 글쓰기 기술이야.'
대회 당일, 하얀솜의 이야기는 큰 호응을 얻었어요. 심사위원과 참가자들 모두 감동했죠. 시상식 단상 위에 하얀솜이 올라갔을 때, 발표장 한 구석에서 누군가 천천히 일어섰어요.
"실례합니다만. 이 이야기는 제 작품과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그는 남극에서 온 펭귄 작가 얼음별이었어요. 그의 말에 장내가 술렁였죠. 잠시 후, 다른 자리에서도 하나 둘 동물들이 일어났어요.
"여우 작가 붉은꼬리입니다. 첫 번째 책에 제 글의 설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곰 작사가 꿀단지에요. 최근 책의 한 구절이 제 가사와 똑같아요!"
"저는 다람쥐 도토리입니다.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하얀솜의 숲 속 창작 대회 수상작은 분명 제 이야기입니다!"
하얀솜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말문이 막혀 버렸어요. 결국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미안해요. 처음에는 그저 인정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어요. 거짓이 밝혀지는 것도, 제가 잊혀지는 것도, 일어날 모든 일들이 너무 두려웠어요."
엎드린 채로 울고 있는 하얀솜에게 부엉이 선생님이 다가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저작권은 단순한 법이 아니란다. 창작자의 시간, 열정, 마음을 존중한다는 약속이지."
도토리도 다가와 한마디 덧붙였어요.
"제 이야기가 좋았다면, 처음부터 함께 만들어볼 수도 있었어요."
그날 이후, 하얀솜의 모든 수상 기록과 출판물은 사라졌고 화려했던 작가 생활도 끝이 났습니다.
4.
몇 달이 지났어요. 하얀솜은 조용한 다락방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창가에 턱을 괴고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을 보다가 문득 자신의 예전 노트를 하나 펼쳐보았어요. 그리곤 자신의 모든 노트를 정성 들여 읽어보았어요.
"정말 내 마음속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요.
"누구세요?"
문을 열자, 반짝이는 검은 털의 토끼가 서 있었어요. 숲 속 마을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친구인 '그리미'였어요.
"하얀솜, 만나고 싶었어. 네 얘기를 들었거든."
하얀솜은 고개를 떨궜어요. 모두에게 실망을 안긴 하얀솜은 친구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리미는 따뜻하게 말해주었어요.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 내 그림이 너무 부족해 보여서 남의 작품만 따라 그렸거든."
하얀솜은 눈이 동그래졌어요.
"하얀솜. 우리 같이 작업해 보자. 네 이야기와 내 그림으로. 진짜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자."
그날부터 두 토끼는 매일 함께 작업했어요. 의견이 부딪힐 때도 있었지만, 그만큼 더 단단한 이야기가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반년 뒤, 드디어 책이 출간되었어요. 제목은 [두 토끼의 숲 속 여행기]. 제목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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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창작자들에게. 우리의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각자의 목소리는 저마다 특별하답니다."
글: 하얀솜 / 그림: 그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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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숲 속 마을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기 시작했어요. '남의 이야기를 훔친 부끄러운 토끼'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낸 용기 있는 토끼'가 된 이야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