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태용 Sep 30. 2019

29. 주체적 삶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채로 있다. 인간에게 단순한 생존은 이제 나이 들고 병든 자들의 문제이지 젊고 건강한 자들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국가, 종교, 가정은 방황하는 개인에게 삶의 목적을 이야기한다. 애국심, 경건, 행복과 같은 개념들은 개인들의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살아가는 이유를 주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을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사회가 주는 선택지는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고 환경적 요인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특정 선택들을 하게 된다. 나도 그러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32세의 군의관이 될 때까지 나의 선택은 결코 주체적 선택은 아니었다. 많은 부분이 알게 모르게 타인과 사회의 강요에 의해 행해진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여겨졌다. 물론 그런 선택들이 나쁜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지만 주체적 결정과 주체적 삶에 대한 단서를 이제 잡았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예전 대학교를 다닐 때 지금은 폐교가 된 나의 모교 '서남대'는 이사장의 비리와 방만한 운영으로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고통받았다. 그 시절의 수동적인 내가 보다 적극적으로 주체적 결정을 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7~8년이 지난 지금도 하고 있다. 나는 단순히 피해자 중 한 명의 자리에 만족했었고 누군가 결정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수동적 삶과 주체성을 잃고 고통받고 있다. 그것은 나의 과거 역시 마찬가지이다. 폐교 위기에 처해 졸업은 할 수 있을지, 국가고시는 치를 수 있을지 불안에 떨던 나는 전형적인 수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이고 당시 내가 수동적 삶을 산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나의 영역 밖이야'라고 생각하며 자위하고 있었을 뿐이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학교의 폐교와 마음의 고통도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한 나의 책임이다. 

 

 독서를 하며 통찰력을 기르고 나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시간들을 군의관 시절에 가지며 나는 삶의 가치관을 새롭게 다졌다.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내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되지만 그만큼 나는 딸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깨달을 수 있었다. 딸이 태어나고 자라며 스스로의 힘으로 걷고 세상을 배워 나가는 과정을 보며 나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동시에 내 안의 어리고 상처 입은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써왔던 글들은 아이를 양육하며 얻은 생각들이기도 하며 미래에 이 글을 읽을 딸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육아를 하며 보았던 인간 본연의 모습과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장 방향에 대해 나는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다른 연구도 함께 읽고 생각해왔다. 또한 그 자연스러운 성장을 넘어 탁월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왔다. 


많은 것들이 이어져 있었다. 


 나의 육아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주며 그것은 타인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역사와 타인에 대한 이해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사회를 이해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단서를 또한 얻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또 육아 철학에 적용하여 보다 나은 육아를 할 수 있게 된다. 나에 대한 이해는 타인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며 자녀와 아내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인간 개개인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 공동체와 집단, 사회와 국가를 이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통찰의 시작은 나를 아는데서 시작된다. 여전히 나는 나를 모르지만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 계속 나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하려고 노력한다. 여전히 나의 어린 시절의 많은 부분이 기억의 저편 망각 속에 묻혀 있다. 이러한 습관은 내가 나아가야 할 바른 이정표를 제시하고 주체적 삶이 어떠한 것인지 알려준다.


 아직도 많은 부모와 젊은 시민들이 삶에 치여 허덕이며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접하면 가슴이 아프다.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세대지만 개인으로서 자유를 얻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경직된 평가의 잣대가 모든 사람에게 대어지며 기준 미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패배한 것처럼 여겨지는 세대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우린 자기 자신보다 그 잣대의 기준에 초점을 맞추고 잣대에 스스로를 맞춰가려고 보다 노력하는 것 같다. 스스로 기준에 맞추려고 하면 튀어나온 부분을 눌러야 하며 깎아 내야 한다. 자기 자신을 깎아 내는 고통은 상처와 흉터를 동반한다. 성공적으로 스스로를 잣대에 맞춘 사람은 자신이 상처가 있는지도 모른 채 즐거워하고 더 높은 계층의 새로운 잣대에 자신을 쑤셔 넣을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잣대보다는 스스로의 내면에 보다 집중할 필요가 있다. 명상을 하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우리 자신의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선택에 어떤 사상과 환경이 그러한 선택을 내리게끔 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방해 요소를 쳐내면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자녀가 그렇듯 우리 역시 어린 시절엔 탐험가였고 발명가였으며 꿈 많은 소년 소녀였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28. 아이의 운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