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애리 Aug 27. 2020

나는 오늘부터 <꽃보다 엄마> 촬영 중

01. 엄마, 나영 고치 여행 가쿠가?



“엄마, 다음 달이면 ‘무한도전’ 종영돼.

그럼 나 이제 백수니까 작년에 못 갔던 환갑여행이나 갈래?” 

"진짜?"


딸이 백수가 된다는데, 엄마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 떨림이 느껴진다.


“엄마, 이번에 병원 가면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봐. 장거리 비행기 타도 되냐고.”

“알겠어.”  

“엄마는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나야 네가 데려가는 데면 어디든 좋지.”  

“아빠랑 가려고 했다가 못 가본 미국 갈까? 스페인 일주는 어때? 남미는 좋은데 멀긴 하고...”

“네가 알아서 짜 봐. 엄마는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잖아.”



나는 예능작가이기도 하지만 ‘김정미 여행사’를 수시로 운영하고 있다.

때때로 가족, 친구, 지인들의 여행 일정을 짜주었고

그 들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만족감을 표현했을 때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패키지여행보다는 자유 여행 전문이며, 배낭여행보다는 캐리어 여행 전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며 감사하게도 촬영차 휴가차 해외 곳곳을 다닐 기회가 많았고,  

여행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자 제일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취미는 세계 도시 스노우볼 모으기.

할배, 누나, 청춘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정작 엄마를 모시고 여행 가기는 쉽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30대 딸이기도 하다.

엄마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62년째 살고 있다. (작년에 환갑이 지났다.)    

엄마의 남편이자 나의 아빠는 10년 전, 6개월 동안 암과 싸우다가 두 명의 대학생 딸들과 중학생 아들을 남겨두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이별은 준비해도 아프다. 아빠에게 살갑게 굴지 못했던 목석같은 딸이었어도 그 슬픔은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는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10년 동안 우리를 강하게 지켜주셨고, 대학생이었던 딸들은 현재 방송국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며, (프로그램이 끝나고 스크롤에 이름이 나란히 나간 적도 있다.) 중학생이던 아들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아들 딸들이 각자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엄마는 이제 자유다.    



며칠 후, 엄마는 카카오톡으로 나에게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여러 홈쇼핑 채널에서 다양한 여행 상품을 판매하는데,

엄마는 쇼 호스트가 설명할 때 나오는 여행지 소개 영상을 보며 TV 화면을 핸드폰으로 찍어 보낸 것이다.  

딸내미에게 어느 나라인지 설명하기 위해

아직은 익숙지 않은 스마트폰으로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며 사진을 찍었을 테지.

‘콜로세움, 트레비 분수, 포로 로마노...’

전부 흔들리거나 초점이 나간 사진이지만 전부 이탈리아에 있는 고대 로마 유적지였다.

아, 엄마는 로마에 가고 싶으셨나 보다.


“엄마, 이탈리아 가고 싶어?”  

“여기가 이탈리아야? 내가 꼭 이탈리아 가고 싶은 게 아니고, 그냥 TV에 나오길래.

 친목모임 갔더니 유럽 다녀온 아줌마가 스위스도 좋았다던데. 거긴 멀어?”

“스위스? 이탈리아에서 기차 타고 갈 수 있어.”

“그런데 다른 나라 가도 괜찮아. 네가 이탈리아도 스위스도 여러 번 가봤잖아. 또 가면 재미없지.

  나는 집 밖으로 나가면 아무 데나 다 좋으니까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여기서 잠깐!

엄마는 지금 수능 영어 문제보다도 어려운 엄마만의 화법으로 나에게 말하고 있는 중이다.

한 줄로 설명 가능한 문장을 베베 꼬아서 열 줄 이상으로 늘려 놓고서는 '이 글의 요점을 찾아내시오' 같은 수능 영어 지문. 우리는 이미 고등학교 3년 동안 수없이 연습했지만 실 생활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화법. 그래서 가끔 수능 영어 지문 같은 대화를 할 때면 요점을 놓치기 쉬운데, 지금 엄마와의 대화가 바로 그렇다.  

그녀는 정말 아무 나라나 가도 괜찮은 것일까? 정확한 해석은 온전히 딸인 나의 몫이다.

왜 엄마는 딸에게

'딸아, 엄마는 이번에 이탈리아와 스위스로 떠나고 싶구나. 함께 가지 않을래?’

라고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것인가.



2013년, tvN <꽃보다 할배> 대만 편 방송이 끝난 후 한동안 국내에서는 대만 여행 붐이 일었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타이베이 타오위안 공항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30분.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궁박물관과 여왕 바위가 유명한 예류 지질공원, 애니메이션 '센과 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된 지우펀, 철길 위에서 직접 풍등을 날릴 수 있는 스펀, 그리고 스린 야시장의 다양한 먹거리와 타이베이 101 빌딩의 야경까지 완벽해 그야말로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차근차근 둘러보기에는 좋은 여행지이다.   


“요즘 네가 한 방송 때문에 대만 많이 가더라.”

“한국에서 가까우니까 부담 없이 가는 거겠지 뭐.”

“주변에서 다들 대만 다녀온 이야기 하더라고.”

“엄마도 친구들이랑 다녀와.”

“친구들은 벌써 부부동반으로 다녀왔지.

  난 내 딸이 그 프로그램을 하긴 했지만, 별로 대만은 가고 싶지 않더라.”  


그날 저녁 나는 타이베이행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다음날 호텔을 예약했으며,

그다음 날 엄마와 김포공항 국제선에서 만나

‘꽃보다 할배’가 여행한 코스대로 대만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대만 여행을 별로 가고 싶지 않다던 엄마는

이순재 선생님보다 더 빨리 한자를 해석하며 길을 찾아다녔고,

신구 선생님보다 더 오랫동안 중정기념관의 교대식을 보고 감탄했으며,

박근형 선생님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으며,

백일섭 선생님보다 더 많은 망고를 드시고 좋아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는 엄마와의 대화에서 정확하게 요점을 짚어내고 대답해야만 했다.   



“그럼 이왕 가는 거 이탈리아도 가보고 '꽃보다 할배'에 나왔던 스위스랑 파리까지 어때?

 엄마, 나랑 같이 여행 가볼래?

“좋아. 너만 괜찮으면 가보자.”

 

엄마, 나영 고치 여행 가쿠가?



나는 지금, 할배도 누나도 청춘들도 아닌 나의 엄마와 여행을 떠나보려고 한다.

내일 당장 떠나는 게 아니더라도 계획하는 것부터가 여행은 시작된다.

엄마, 준비됐지?

지금부터 <꽃보다 엄마> 촬영

슛 들어 갑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