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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애리 Dec 10. 2020

엄마,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어

4.엄마에게 하면 안 되는 말



제주도에 있는 우리 집 근처에는 요양원이 있다.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요양원 앞을 지나가며 목욕차량에서 내리는 할머님들을 보았다.

문득 언젠가는 내가 엄마를 씻겨줘야 하는 날이 오겠구나 싶어 갑자기 서글퍼졌다.

“엄마, 여기 위치랑 시설 잘 봐 둬.”

“왜?”

“나중에 엄마가 살 곳이니까.”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실버타운 보내준다더니. 요양원으로 바뀌었어?”

“엄마, 요양원도 엄청 비싸.”

“저기도 들어가려면 대기 명단이 얼만 줄 알아? 걱정 마. 너희 걱정시킬 정도로 아픈데 오래 살지  부르면 바로 갈 거야. 엄마 죽으면 아빠 옆에 묻어 줘.”

순리대로 살다 가겠다는 말.

그 이유가 자식들 고생시킬까 봐서라니.


“엄마,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가는데 순서가 없잖아.”

엄마가 진지하게 얘기할 때면 불현듯 무서워져 엄마에게 하면 안 되는 말로 대답하곤 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감히 내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엄마 없이 우리 세 남매만 남겨지는 상황이 생긴다고 상상하니 무섭기도 하고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늘 우리에게 강한 모습만 보여준 엄마였기에 엄마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엄마가 찮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엄마는 영원히 살아계실 거라는 믿음 때문인 건지 계속 그렇게 모르는 척하고 살고 싶었다.     

      


오랜만에 집 앞에서 친한 언니를 만났다.

지방에 계신 언니의 엄마가 무릎 수술을 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재활하기 위해 요양병원에 입원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금지돼 한 달 뒤찾아뵀더니 엄마의 병세가 더 악화됐다며 속상해했다.

“어쩌다가?”

“엄마가 움직이려고만 하면 자꾸 안정제를 투여했나 봐.”

입원해 있는 동안 어머니는 스스로 화장실을 가고 싶어 했는데, 오히려 병원 측에서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안정제만 투여했다는 것이다.

언니는 재활은커녕 엄마의 삶의 의지까지 꺾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인간의 존엄성까지 침해당했다는 생각에 참담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엄마가 큰 수술 해서 힘든데, 화장실도 못 가게 해서 더 충격받은 것 같아.”

언니는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를 챙기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다며 자책했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너무 속상했다며 눈물 한 가득 쏟아내고 돌아갔다.

서울에 사는 언니도 누군가의 딸이었다.          



언니를 만나고 와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내가 엄마 아프면 요양원 보낸다는 얘기 취소야.”

“갑자기 왜?”

“그냥, 내가 데리고 살려고.

꼬집어도 내가 꼬집는 게 낫지, 다른 사람이 엄마 꼬집으면 나 눈 뒤집혀서 못 살 것 같아.” 

“넌 왜 엄마를 꼬집을 생각부터 하냐?”   


물론 전국의 요양원 또는 요양병원이 모두 저렇다고 속단하면 안 된다.

자녀들을 대신해 정성으로 환자를 케어해주는 간병인과 전문적으로 재활을 도와주는 시설이 없으면 큰일 나지 암.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지.


전화를 끊자마자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말이라도 데리고 산다고 해줘서 고마워. 

엄마 절대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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