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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May 23. 2024

시각장애견 안내인

줄 하나로 연결된 극적긴장감을 나누며

이전부터 눈여겨봐 왔던 작가님이 공개 강의를 열었다. 마침 여유가 생겨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첫 수업을 들으러 갔다. 수업마다 작은 과제가 있었는데 첫 과제는 ‘다르게 보기’였다. 제대로도 못 보고 있는데 다르게 보기라니. 과제의 의도는 한 방향으로만 보지 말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과제 덕에 머릿속은 무엇을 다르게 볼 것인지 생각이 떠돌았다. 거기에 더불어 2회 차 수업의 주제는 ‘시각장애인과 함께 전시보기’였다.


나의 강아지. 그렇지 않아도 시각장애견 안내인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던 차였다. 오랜 투약 끝에 녹내장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나의 강아지는 눈이 점점 작아지고 눈물이 많아졌다. 완치 판정이라기보다 더 이상 안압의 변화가 없어 고통이 사라지면서 시력 또한 잃었다. 그래서 두 눈이 온전한 때처럼 산책을 즐기지 못한다. 낯선 곳의 향기를 좋아했던 강아지는 낯선 곳에서 부쩍 긴장이 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굉장히 신중하고, 주둥이가 먼저 나가지 못하는 곳에선 주춤거리기 바쁘다. 긴장도 높은 걸음걸이 때문에 쉽게 지치고 다소 느릿한 산책을 해야 했다.


대신 낯선 이가 다가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 사뭇 친절하고 차분한 강아지가 되었다. 다가오는 강아지를 인지하지 못해 '어머, 너 너무 착하다.' 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이 안 보여서 그래요.'라는 답을 건넨다. 눈이 보일 때는 다가오는 개에 대한 긴장도가 엄청났기에 얼추 균형을 이룬 것이라며 위로를 건넸다. 시각장애견이 된 녀석 덕에 매번 가던 길이든 새로운 길이든 어딜 가든 나는 그의 길라잡이가 되어야 했다.

가까워졌다 멀어지기

자연스레 산책할 때 중점을 둬야 하는 부분도 이동했는데, 이전에 가장 조심해야 했던 것은 다가오는 낯선 강아지거나 차처럼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걷는 길' 그 자체였다. 특히 주의해야 할 건 빗물받이 구멍이었다. 눈이 보였던 푸코는 크기가 큰 축에 속하는 강아지라 빗물받이 구멍 정도는 쉽게 뛰어넘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뛰어넘지 못하니 종종 발이 빠지곤 했다.

과거 소형견 주들에게 들었던 빗물받이 구멍에 대한 불만을 이제야 공감해 본다. 치와와나 말티즈처럼 작은 강아지들은 발이 빠져서 깁스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녀석이 발이 빠지지 않고 안전하게 오가기 위해 나는 빗물 구멍이 보이면 ‘뛰어!!’ 하는 신호를 매번 준다. 번번이 실패하지만 살짝 움찔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인식하는 것 같다고 위로해본다.


체고가 낮아 가끔은 자동차 스커트 부분에 부딪히기도 한다. 혹은 바퀴에 머리를 박아 이마에 어처구니없는 무늬를 장식한 채 귀가하곤 한다. 호피 무늬 강아지에 대한 로망을 이렇게 실현시켜 주는 것인가. 그나마 타이어는 부드러운 편이니 얼굴이 더럽혀지는 것에서 끝나지만 딱딱한 곳에 자꾸 머리를 부딪혀 혹시나 뇌에 손상이 갈까봐 고민스럽다. 너른 잔디밭이 아닌 일반 도로를 걸을 때마다 절대 녀석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최대의 복병은 '계단'이었다. 인간에게는 작은 높이의 층계이지만 4족 보행을 하는 개에게는 거의 자기 몸 체고만한 계단이 버티고 있으니 녀석은 꽤 신중하게 층계를 오른다. 사실 오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려가는 것이 더욱 험난할 뿐. 물론 요즘은 어느 시설이든 경사로가 있는 편이지만 간혹 그런 배려가 닿지 못한 곳들이 있다. 자주 다니던 공원이 전체적으로 개선공사를 하면서 조경을 예쁘게 해 놨다. 화려하고 일목요연하게 꽃밭이 생겼지만 경사진 땅에 계단이 생기면서 더 이상 강아지와 그곳을 자유롭게 산책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도 녀석은 가벼워 계단을 만나면 나는 녀석을 어깨에 둘러메고 조심조심 내려간다. 그럼 혹자는 계단이 필요 없는 곳으로 다니면 되지 않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가고자 하는 곳을 코앞에 두고 신체적인 이유로 가지 못할 때마다 느끼는 박탈감이 쌓이면 한 개인을 쪼그라들게 할 것이다. 마치 푸코의 걸음걸이가 점점 소심해지는 것 처럼.

응 까치…?

 눈이 보이지않는 개를 산책시키며 흥미로운 건 녀석과 내가 리드줄 하나로 교감을 하며 길을 나아간다는 점이다. 빗물받이 구멍이 등장하거나 녀석의 체고와 비슷한 SUV 바퀴,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면 나는 리드줄을 잡아당긴다. 그러면 녀석은 멈칫하고 방향을 바꾼다. 어느날 실수로 아무 방해물이 없는 상황에서 줄을 당겼는데, 녀석이 가던 길을 멈추었다. 불현듯 느낀 낯선 손의 감각이였다.


두 눈이 멀쩡할 때 푸코는 매 걸음마다 자기주도적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향해나가기 바빴다. 옆에 있는 동행자는 되레 방해꾼이 된 것 마냥 앞으로 치고 나가 줄을 힘껏 당겼다. 처음 녀석을 만나고 산책을 나서면 서로 완력을 다투느라 산책이 고되었었다. 여타 다른 집 개들처럼 보폭을 맞춰 걷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녀석이였다. 그런 녀석이 지금은 줄의 당김과 팽팽함에 의존한 채 걷고 있다. 나에게 90% 이상을 의존하며 걷는다고 하니 산책길에 대한 무게감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시각장애인 안내견을 마주칠 때마다 녀석들의 포근한 표정 너머로 묘한 무게감이 느껴졌던 것은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니였다는 걸 새삼 느끼며 존경을 표한다.

시력을 잃은 녀석 덕에 눈이 보여도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게 되었다. 시각의 기민함과 시야의 확장. 이어지는 글은 촉각의 발달의 영역에 닿아보고자 한다.

촉각으로 느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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