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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Jun 21. 2024

이 더위에 털덩어리들을 주무르며

촉각-터치와 터치 사이

‘강아지 만져봐도 돼요?’


'만진다'는 행위는 우리나라 문화에서 왠지 낯선 단어다. 유교 문화라 그런지 공동체라는 관념적 단어에 비해 사람간의 퍼스널 공간은 상대적으로 먼 편이다. 거기에 더불어 코로나 이후 작은 접촉도 꺼려지는 세상이 되었고 우리 개개인 모두 거리를 당연시 두어야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병균이 된 것 마냥.

'남녀칠세부동석'을 듣고 자란 사람으로써 스킨십이라는 단어는 왠지 낯부끄러웠다. 비단 남녀사이 뿐만아니라 부모와도 생각보다 살을 부대낀 경험이 적으며, 여전히 포옹하는 것이 어색하다. 살을 나눠준 부모에게 조차 이러는데 남은 오죽할까. 여름엔 대중교통에서 다른 사람의 살갗이 닿는 것이 싫어 1시간 20분 거리의 통학길에 내내 서서 가기도 했었다. 처음 연애를 할 때도 사람의 손길이 닿는 것이 어색했다. 가끔 어깨가 무거워 마사지를 즐겨 받긴 하지만 오일로 마사지사의 손이 살갗에 직접 닿는 방식보다는 옷이라는 레이어가 한 층 낀 건식 혹은 스포츠 마사지를 선호한다. 찜질방이나 사우나는 개념적으로 좋아하지만 몇 시간이고 앉아 체액이 흘러나올 때까지 앉아 있는게 썩 즐거운 일이 아니였다.

에어컨 틀어줭

심지어 바디로션을 바르게 된 것도 오래지 않다. 샤워 후 온몸을 내 손길로 구석구석 미끄덩 거리는 로션을 발라내는 게 여간 어색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엄마와 바디로션 이야기를 나누며, 평생 바디로션 한번 발라본 적 없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성 자체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내 살갗은 푸석푸석하여 바디오일 위에 바디로션을 코팅해줘야 겨우 부드러워지는데 엄마는 이런 불편한 과정 없이도 부드러운 살갗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조한 내 성격만큼이나 내 살갗도 건조했던 것 같다. 덕분에 더더욱 누군가와의 살 접촉을 어색해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더위에 녹아 내린 녀석들


환경적 요인과 개인의 천성적인 요인이 어우러져 나는 살을 접촉하는 것을 어색해 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코로나를 겪으며 ‘만지고 접촉하기’에 대한 나의 능력치는 현저히 쇠퇴했다. 인간이 지닌 오감 중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이 촉각이다. 아기들은 모든 것을 만지고 입으로 가져간다. 대상을 구별해내기 위해서 이다. 


그런데 점차 더군다나 요즘 같은 때는 모든 감각이 ‘시각’으로 편중화 되고 있다. 먹방은 대표적인 예이다. 화면 너머로 DJ가 먹음직한 음식을 한상 차려놓고 대화창을 살펴보며 맛있게 먹는다. 미각, 후각, 촉각은 없는 시각과 청각으로 음식의 맛을 전한다. 사실 음식의 맛은 전해지지 않는다. 유투버가 아는 음식을 묘사하는 말들로 가공된 생각들을 전달할 뿐이다. 온라인에서 옷을 사고 막상 받아보니 형편없는 재질에 실망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코로나 기간동안 히트를 쳤던 바디프로필도 그 현상 중 하나다. 심지어 어떤 체육관들은 스튜디오와 연계하여 ‘바디프로필 4주 완성반’ 같은 프로그램을 내놓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프로그램은 꽤 성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점점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비트화된 이미지가 전달하는 것으로 많은 것을 판단한다. SNS는 이를 가속화 시킨다. 세상을 접하기 위한 접촉은 오로지 두 엄지 손가락이 화면을 닿는 것이 전부이다. 당연히 감각의 오각형이 균형있게 작용하기 어려워진다. 만약 실제로 운동한 몸을 만질 수 있다면, 화면 속 음식을 혀로 음미한 뒤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세상이 되었을까.

둘은 에어컨 밑에서 친구가 되었다

푸코와 두부는 털로 뒤덮혀있다. 나는 가끔 생각이 많아지거나 심장이 두근거릴 때 녀석들을 쓰다듬곤 한다. 마냥 털로 덮혀있는 것 같지만 미세한 심장 박동, 털 아래의 묘하게 움직이는 근육 덕에 단순히 인형을 만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인지 멀리서 녀석들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다가와 둘을 만져보고 싶어한다. 보드랍고 부들부들하다는 시각적 인식을 거친 후 만지는 행위를 시도해보려고 한다. 

푸코의 경우 사람들의 손길을 간혹 즐기는 편이라 흔쾌히 인사를 한 뒤 만지시라 대답을 한다. ‘아우 정말 보드랍다.’ 대부분의 반응이고 녀석을 조금 세밀히 만져보시는 분들은 머리통, 등, 꼬리 부분의 모질이 모두 다르다는 걸 알아채린다. 그리고 때로는 녀석의 두툼한 턱살을 조물락 거린다. 녀석은 사람들의 애정담긴 부드러운 손길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어느 때는 심지어 드러눕고 온 몸을 타인에게 맡기기까지 한다. ‘그렇게 좋은가?’ 물론 푸코가 처음부터 사람의 손길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갑자기 다가오는 손길에 으르렁 대기도 하고 강아지와의 인사를 생략했던 친구는 물린 적도 있다. 그랬던 녀석이 점차 사람의 손길에 익숙해져간다.

만져죠 죠아죠아

비대면이 익숙해지고, 언젠가 AI와 원격시스템이 모두 대체될 것 같다는 아득한 전망 속에서도 사람들이 화면 밖으로 나가 서로를 그리워 하는 건 살맞댐이지 않을까. 햅틱 기술이 발전하고 탠저블 기술이 발달하면 그땐 더이상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까? 글쎄, 아니라고 본다. 무더위에 다들 지쳐 서로의 숨결이 닿는 것조차 불쾌한 날씨지만, 서로를 만지며 감동한다. Touching is Tou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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