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말하는 감자라구요
#1
제가 초등학생 때 (라떼는 말이야) '12살에 부자가 된 키라'라는 만화책이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아마 재테크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지금 검색해보니 독일에서 출간된 책이었네요 (역시 아동용 책마저 진지한 독일). 12살이면 부자가 되기에는 상당히 이른 나이인 것 같습니다. 아마 '최연소'라는 개념으로 설정된 것이겠죠. 이처럼 사람들은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꽤나 좋아합니다. 행정고시나 사법고시 합격자가 발표되면 최연소 합격자 인터뷰는 꼭 실리더라고요. 사람들이 '최연소' 타이틀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천재 같아서?
#2
저는 학창시절 과목 중에 물리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이유는 상당히 단순했습니다. '규칙에 예외가 없어서'. 화학에는 많은 규칙들이 있지만 늘 예외가 있다고 느꼈고 (주기율표만 봐도 그렇습니다). 생물과 지구과학은 통일된 규칙이 있는 학문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물론 수학만큼 규칙을 중요시하는 과목도 없었지만, 물체의 움직임을 통일된 규칙으로 설명하는 물리에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할까요? 그래서 제 장래희망은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 또 하나는 역학 관련된 연구원. 안타깝게도 제가 어쨌든 이번 생의 하트는 하나이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골라야했고, 조금 더 공부를 해보고 싶어 연구원으로 진로를 잡고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면 물리 수업도 할 수 있고 역학 연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제가 교수가 되었을 때 부모님는 다른 것보다도 제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두 가지 꿈을 이뤘다는 사실이 가장 기쁘셨다고 합니다.
#3
저는 94년생으로 내일이면 다시 29입니다. 우연하게도 제가 30이 된 올해에 만 나이법이 바뀌어서 뭐랄까요 갑자기 하늘이 저에게 오더니 '너를 기특하게 여겨 20대로 살 수 있는 시간을 1년 아니 6개월 더 주겠다!'라고 한 기분입니다. 길거리에 쓰레기 안 버리면서 살아오길 잘 한 것 같습니다. 이게 원래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6개월 더 20대로 살라고 하니, 뭔가 특별한 일을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나름 고충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제부터 빛의 속도로 달려서 평생을 20대로 사는 방법도 있겠네요 (숨이 너무 차서 이 방법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덕분에 '29살에 교수가 되다' 타이틀도 쓸 수 있었네요. 이걸로 만족해야겠습니다.
#4
앞의 3가지 이야기를 한 가지 주제로 묶자면, 어쩌다보니 저는 올해 3월 29살에 한 국립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브런치에 3달 넘게 글을 못쓴 이유도 스웨덴에서 2월 중순에 부랴부랴 귀국해서 1학기를 정신없게 보낸 까닭입니다 (네 핑계입니다 하하하). 100만이 넘는 구독자분들을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한 마음입니다. 유체역학 수업도 하고 연구도 하고 나름대로 학창시절 장래희망을 이룬 것 같습니다. 제가 있는 대학의 약 1000분 정도 계시는 전임교원 중에 아마 제가 최연소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재도 아니고 수재도 아니고 천재도 아닙니다 (중학교때 영재교육원을 다녔으니까 준영재정도는 맞을 수도?). 아직도 비압축성 유동과 압축성 유동 나비에-스토크 방정식을 헷갈려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다 보니 이런 좋은 기회를 잡은 것 같습니다.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공부해야할 것도 많은 감자지만, 저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학생들을 열심히 찾아 그 일을 하게 만들어 줄 생각입니다.
#5
원래 이 브런치 블로거는 스웨덴 포닥일기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만, 6개월 만에 제가 귀국하게 되어 조금 민망한 상황입니다. 원래 인생은 한치 앞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재밌는 것은 스웨덴 도착에서 바로 신청한 거주허가증보다 제 한국 귀국이 더 빨랐습니다(스웨덴의 느린 문화와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의 환장의 콜라보). 앞으로는 초짜 교수 일기에 못 다한 스웨덴 일기를 적절히 섞어 써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지만 임용 팁과 후기도 조만간 써보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