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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삼오 Aug 01. 2020

라디오와 장기말 놀이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스스로를 황야의 이리라 여기는 중년의 남성 하리 힐러는 시민 사회와 어울리지 못한 채 고립되어 살아간다. 그는 '자살자'답게 죽음에 강한 충동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들른 바에서 헤르미네를 만난다. 죽음의 문턱에서 만난 그녀는 그를 쾌락의 세계로 이끈다. 그 후 하리는 마리아와 파블로와 친구가 되고, 춤을 배우고,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는 등 시민사회에 녹아드는 듯했으나 결국은 그의 일부인 이리의 비아냥거림을 느끼고 이질감에 휩싸인다.
 무도회가 끝나고, 파블로를 따라 '마술 극장'으로 향한 하리는 묘약을 마신 후 수많은 방들, 그 안에서의 환각과 함께 내면의 자아들을 하나하나 느껴내며, 자신에 대한 이원론적 해석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정복적 욕망에 휩싸여 세계를 영혼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차르트와 파블로의 조언을 무시한 채  헤르미네를 칼로 찔러 죽인다. 다시 한번 나타난 모차르트는 그에게 영원한 이상과 현실의 차이, 그리고 유머를 설명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자아 분열을 극복하기를 다짐하는 하리의 모습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1) 이상과 현실의 영원한 괴리- 그리고 유머

 "거기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예요, 하리. 내 꿈이 정당했다는 것, 백 번 천 번 정당했다는 거예요. 당신의 꿈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삶은, 현실은 정당하지 않아요."

 헤세는 헤르미네의 입을 빌려, 그리고 모차르트의 입을 빌려 이상과 현실의 영원한 차이와 괴리감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는 이상과 현실 둘 중 어느 하나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숭고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하리의 비현실적 이상의 정당함을 인정하면서도 시대의 과오를 -비록 그 현실이 끔찍할지라도- 씻어내는 것 또한 우리의 책임이라 말한다.

 "삶은 기술과 정신없는 활동, 추한 욕구와 허영심을 이념과 현실 사이에, 오케스트라와 귀 사이에 어디에고 밀어 넣는 것이라네.  인생이란 그런 거라네.  우리는 그걸 있는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네. 그러니 당나귀가 아닌 이상 우리가 웃지 않을 수 있겠나."

 '황야의 이리론'은 시민사회와 이상의 괴리에 따른 자아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언급한다. 그 방법은 유머를 통해 시민사회와 '계약 결혼'을 하는 것 -이는 곧 파블로가 택한 방법이다-, 그리고 불멸의 존재 -이를테면 모차르트- 의 본보기를 따라 내면의 다원성으로 돌파해 들어가는 것. 하지만 파블로는 곧 모차르트였고, 하리는 유머를 택하는 것과 불멸의 존재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불멸의 존재들조차 유머를 통해 자아와 현실에 대한 화해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끔찍한 시대의 과오 그 사이에서 이상과 개성을 좇는다는 것- 그것이 헤세가 말하는 인생이다. 모차르트는 인생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비유한다. 기계 덩어리에 불과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일지라도 분명 그 안에는 사라지지 않는 음악 자체의 숭고함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살기 위해 지나친 비장함 대신 유머를 배워야 한다. 음악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인생의 라디오 음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뒤에 숨은 정신을 존중하며, 거기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비웃어낼 줄 알아야 한다. 진지하게 여길 가치가 있는 것을 진지하게 여기고, 그 외의 것은 비웃어버리는, 이상과 현실의 지독한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유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유머를 통해서 세상을 부정하면서도 살아내는 것이므로-


2. 수십만의 장기말으로 벌이는 인생의 유희

 "만약 그 정원의 정원사가 식용식물과 잡초 이외에는 다른 식물학적 구분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이 정원의 십 분의 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해할 것이다. 그는 가장 매력적인 꽃들을 뽑아버리고, 가장 귀한 나무들을 잘라버리거나 아니면 싫어하거나 못마땅해할 것이다. 황야의 이리는 자기 영혼의 수많은 꽃들을 이런 식으로 다룬다."

 '황야의 이리론'은 복잡한 영혼을 두 갈래로 나누는 것에 집착하는 하리 힐러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삶이란 무수한 쌍의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기에, 헤세는 인간의 자아가 다분법적으로 관찰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침착하고 능란한 손놀림으로 그는 나의 인물들을 집어 들었다. 노인, 청년, 아이, 여자, 명랑한 것, 슬픈 것, 강한 것, 부드러운 것, 재빠른 것, 진솔한 것 모두. 그러고 나서 그는 이것들을 장기판 위에 민첩하게 배열하여 하나의 놀이를 만들었다. 거기서 이것들은 서로 얽혀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었다. 그는 잠시 넋을 잃고 있는 내 눈앞에서 질서 정연하면서도 활기찬 이 작은 세계가 움직이게 했다."

 주머니 속의 무수한 장기말들을 장기판 위에 능숙하게 배열하는 놀이에 능숙해질 때- 즉 무수한 자아를 내면에 품고 자유롭게 인생을 펼쳐나가며, 유머와 함께 인생의 유희를 즐길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


#

 서사에만 초점을 맞추어 읽으면 난해하고 오묘하기만 하겠지만, 인물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담은 의미를 읽어내는 순간 진가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책이었다. [황야의 이리]를 통해 헤세는 [데미안]에서 추구했던 내면의 탐색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이후의 실존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까지 제시한다. 개성이 발달함에 따라 이상과 현실 그 어딘가를 떠도는 사람들에게, 정당한 꿈을 품고 있으나 현실에 그 꿈을 저지당하는 비극적인 사람들에게, 현실에 맞서지도, 순종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유머는 구원을 위한 묘약이 된다. 그 묘약으로 '인간'이 될 때, 그들은 이윽고 세계 전체를 자신의 영혼에, 그 고통스럽게 확장된 영혼에 받아들임으로써 현실을 긍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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