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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삼오 Jun 11. 2021

신은 사랑이니까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시대에 맞지 않는 요소들이 많았으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도 과격했다.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면 권하지 않겠다. 트리거가 될 만한 장면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격한 표현 방식과 시대착오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그 어떤 영화를 보면서도 이 정도로 운 적은 없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펑펑 울었다. 휴지를 몇 장이나 적셨다.

 '오카에리(어서 와)'라는 말 한마디를 듣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그녀의 삶이 절절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며 '타다이마(다녀왔어)'라고 중얼거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몇 번이나 버림받으며 '난데?(왜?)'라고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은- 말 그대로 아팠다. 가슴 한편에서 시작된 통증은 온몸으로 퍼졌다. 병적으로 의존적인 그녀를, 바보 같고 엉망진창인 삶을 살아가는 마츠코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비밀스레 자리한 소망에 누구보다 솔직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싶다, 그리고 사랑받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 그녀는 모두의 마음속 깊은 곳에 비밀스레 자리한 그 욕구를 세상 밖에 드러내며 살아갔다. 사랑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래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 욕구를 억지로 억눌러야만 하는 이 세상에서, 그녀만은 사랑 앞에 용감했다.

 류는 자신의 지난날을 뉘우치며 '마츠코는 신'이라 말했다. '신이 사랑이라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가 신이라면, 신은 마츠코다. 마츠코는 나의 하느님이다.' 마츠코의 조카 쇼는 류의 말을 곱씹으며 '신이 마츠코처럼 사람에게 웃음을 주고, 힘을 주고, 사랑하고, 하지만 자신은 늘 상처 받아 너덜너덜해지는,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라면- 나는 그 하느님을 믿고 싶다'고 말한다.

 아무리 상처 받아도,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마츠코는, '언제나 어서 오라 말해줘, 사랑이 곧 삶이지' 하고 노래하던 마츠코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결국 그 누구도 그녀에게 어서 오라 말해주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속 구절처럼, 인간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 무얼 받았는지로 정해지는 게 아니니까. 한 인간의 가치를 만드는 건 '다른 사람에게 무얼 줬는지'니까. 마츠코는 그 누구보다 숭고한 삶을 살았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아니다. 마츠코의 '혐오스런 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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