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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삼오 Jul 31. 2020

'그것들은 모두 내 안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한 인간의 정신이 어떠한 이야기 속에서 형상화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바로 그것이 내가 그리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루키는 말한다. 그리고 하루키는 현실과 초현실 사이에 놓인 열다섯 살 소년인 카프카에 자신의 모습이자 어쩌면 인간 그 자체의 모습을 투영하여 정신의 고착화를 그려낸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구원이 없을 수도 있어, 그러나 아이러니가 인간을 깊고 크게 만들거든, 그것이 더욱 높은 차원의 구원을 향한 입구가 되지, 거기에서 보편적인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어.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비극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예술의 하나의 원형이 되고 있는 거야. 다시 되풀이하게 되지만, 세계의 만물은 은유라고 하는 메타포거든. 누구나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육체적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는 메타포라는 장치를 통해서 아이러니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스로를 깊게 그리고 넓게 다져나간다는 얘기야."


 인간은 운명을 선택할 수 없다, 운명이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장치로서 묻혀 있는 예언'에 갇혀 무력함과 공포감을 느끼는 카프카에게 오사마는 '네 선택이 헛수고로 끝날 운명일지라도 너는 어김없는 너'라고, '너로서 전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러니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그 아이러니란, 누구나 자신의 미질(美質)에 의해 비극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것.


"하지만 그런 평온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넌 알고 있다.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짐승처럼, 너를 어디까지나 뒤쫓을 것이다. 깊은 숲 속을 그들은 찾아온다. 그들은 터프하고, 집요하고, 무자비하고, 피로나 체념이라는 것을 모른다. 지금은 마스터베이션을 참을 수 있었다 해도, 그것은 얼마 뒤 몽정이라는 형태로 찾아올 것이다. 너는 그 꿈속에서, 진짜 누나나 어머니를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너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은 네 힘을 초월한 일이다. 너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너는 상상력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꿈을 두려워한다. 꿈속에서 짊어지기 시작할 책임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잠을 자지 않을 수는 없고, 잠을 자면 꿈이 찾아온다. 깨어 있을 때의 상상력은 어떻게든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꿈을 막을 수는 없다."


 이 아이러니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현실에서든 무의식에서든 반드시 실현된다. 초월적 힘을 지닌 아이러니이자 꿈은 영혼의 어두운 통로를 통해 스며들어 무의식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애초에 세계는 내부의 것에는 외부의 것이, 외부의 것에는 내부의 것이 투영되는 거대한 상호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그 말을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히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소설 속 카프카 또한 현실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아이러니와 대면한다. 마스터베이션의 욕구를 현실에서 억눌렀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은 사라지지 않고 꿈의 형태로 드러나며, 아버지에 대한 살해의 욕구는 기억의 소멸과 함께 옷을 적신 핏자국으로 드러난다. 오이디푸스적 예언은 지치지 않고 카프카를 뒤쫓는다.
 결국 소년은 세계라는 거대한 메타포를 통해 이 내면의 아이러니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예언과 대면한 그는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바람, 즉 내면의 소리를 전하는 액상적 메타포에 귀를 기울인다. 흐르듯 바람을 따라간 카프카는 이내 우연을 가장한 계시를 만나게 된다. '보면 안다'는 말을 반복하며 이끌리듯 떠나 입구의 돌을 만난 나카타 역시 같은 맥락을 통해 계시를 느낀다. 이 추상적 여정에서 카프카와 나카타는 황홀함 느끼는 동시에 때로는 고통 또는 방황과 함께하지만, 모두 몸과 마음으로 오롯이 견뎌내며 자아와 마주한다.
 그 긴 여정의 끝, 메타포를 이해하고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더 나아가 계시를 관찰하는 것을 넘어 그를 따라 움직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고, '정신의 형상화'를 경험하며 깊어진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조차 없어. 거기에는 백골을 분쇄해 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런 모래 폭풍을 상상하란 말이야. (중략) 그리고 물론 너는 실제로 그놈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될 거야. 그 명렬한 모래 폭풍으로부터. 형이상학적이고 상징적인 모래 폭풍을 뚫고 나가야 하는 거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놈은 천 개의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네 생살을 찢게 될 거야. 몇몇 사람들이 그래서 피를 흘리고, 너 자신도 별수 없이 피를 흘리게 될 거야. 뜨겁고 새빨간 피를 너는 두 손으로 받게 될 거야. 그것은 네 피이고 다른 사람들의 피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 폭풍이 사라져 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 거야."


 결국 하루키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이 '모래 폭풍'의 의미가 아닐까. 작가는 친절하게도 그를 뚫고 나오기 위한 일종의 지침까지 제공한다.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모호하면서도 명료한 조언.  

 형이상학적 모래 폭풍 속에서, 몰아치는 그 모든 고통과 자아를 끌어안은 채 소년은 성장한다. 이윽고 소년은 잠이 들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새로운 세상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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