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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삼오 Jul 31. 2020

세계는 표상과 의지일 뿐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의미에 집착하던 때가 있었다. 의미라기보다 거창함에 집착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겠다. 인생에는 분명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 사는가'에 대한 그럴듯한 답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쉽게 찾아지지 않는 그 의미에 매달렸고, 곧 세상에 애정을 느끼지 못할 만큼 지쳐 버렸다.
 이런 나를 겨냥하듯 <무의미의 축제>는 하찮음과 보잘것없음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유명한 도시의 이름이 푸시킨그라드도, 차이콥스키그라드도, 톨스토이그라드도 아닌, 칼리닌그라드가 된 이유와, 어쩌면 인생에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가치와 의미는 그렇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들, 어쩌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들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살아가는, 또는 살아가던 모든 이를 통틀어 자신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생의 첫 시작인 태어남 그 자체부터 모든 일은 우리의 손 밖에서 벌어진다. 인간의 무력함을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모두가 인간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존재에 근거란 없다. 존재의 시작은 물론이거니와, 자의에 따라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하지만 내 눈에는 우리 장난이 힘을 잃었다는 게 보인다. 너는 기를 쓰고 파키스탄어를 해서 흥을 돋우려 하고 있어. 그래 봐야 안 돼. 너는 피곤하고 지겹기만 할 뿐이야."


사실상 삶의 긴 과정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방해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 운명이라 함은 헤르만 헤세가 <황야의 이리>에서 논한 시대의 과오와 같은 것들. 한심하게 굴러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를 뒤엎을 수도, 개조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다. 이에 밀란 쿤데라는 한 가지의 해결책, 아니 어쩌면 방어책을 제시한다: 세상을 심오하게 대하지 않는 것.


"우스운 것에 대한 성찰에서 헤겔은 진정한 유머란 무한히 좋은 기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해. 조롱, 풍자, 빈정거림이 아니야. 오로지 무한히 좋은 기분이라는 저 높은 곳에서만 너는 사람들의 영원한 어리석음을 내려다보고 웃을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그걸 어떻게 찾지, 좋은 기분을? 그걸 어떻게 찾느냐고, 좋은 기분을?"


 그 '무한히 좋은 기분'에 다가가려면 우리는 비장함은 잠시 내려놓고,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인생의 숨은 의미는 어쩌면 인생 그 자체이므로. 숭고한 음악이 끔찍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더라도 라디오보다는 음악 그 자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핵심은 비장함과 심오함, 진지함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 몸에 힘을 빼고 인생 위를 둥둥 떠다닐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일부러 힘을 주어 가라앉은 채 물속을 헤집고 다녀야만 바다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본질이란 어쩌면 가장 단순한 것,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일 테다. 이를테면 전립선 비대증으로 매 순간 요의를 억누르던 칼리닌의 '투쟁'처럼.


"팬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괴로움을 견딘다는 것... 청결의 순교자가 된다는 것... 생기고, 늘어나고, 밀고 나아가고, 위협하고, 공격하고, 죽이는 소변과 맞서 투쟁한다는 것... 이보다 더 비속하고 인간적인 영웅적 행위가 존재하겠냐? 나는 우리 거리들에 이름을 장식한 이른바 그 위인이라는 자들은 관심 없어. 그 사람들은 야망, 허영, 거짓말, 잔혹성 덕분에 유명해진 거야.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거창하고 그럴듯한 가치, 모두의 박수를 받을 만한 커다란 가치를 좇다 보면 그 틈으로 야망과 허영, 거짓과 잔혹성이 비집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과연 그 거창함이 세계의 잔혹함 앞에 유의미한가. 말뿐인 이 세상에서 칼리닌이 가장 단순한, 1차원적 욕구를 눌러가며 경험한 고통과의 투쟁은 어쩌면 가장 평화롭고 기억되어야 마땅한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의 유명한 도시 이름이 차이콥스키 그라드도, 톨스토이그라드도 아닌 칼리닌그라드가 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그 시대 가장 강력한 국가원수이자 세기의 악마라 불릴 만큼 악랄했던 통치자는 그 보잘것없음, 그리고 그에 대한 투쟁에 알 수 없는 기쁨과 일종의 애정을 느낀 것이 아닐까.



 이 책의 원제 <La fête de l'insignifiance>의 'insignifiance'는 '무의미'보다는 '하찮음, 중요치 않음'에 더 가까운 단어라고 한다. 결국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하찮은 것의 가치를 -매 순간 요의를 억누른 칼리닌의 '필사적 투쟁'과 같은- 전하고자 한 것이다.

 결국 이 세계에 똑떨어지는 '실재'란 없다. '실재가 되게 할 것'만이 존재한다. 표상이 실재가 되려면 막대한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표상과 의지일 뿐인 이 세계를 하찮은 것, 보잘것없는 것들이 벌이는 연속적 축제로 본다. 그 축제가 존재의 본질이자 우리가 진정 사랑해야 할 가치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인간은 진지함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솔직해질 수 있을 테니까. 이 모든 것들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한발 더 나아가 그를 사랑하기까지 할 만큼 용기 있는 진솔함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좋은 기분으로 이유도 모른 채 웃는 어린아이들처럼, 명백한 무의미(insignifiance)를 들이마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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