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자가 장자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사람들이 가죽나무라고 하네. 그 큰 줄기는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해서 먹줄을 칠 수 없고, 작은 가지들은 꼬불꼬불해서 자를 댈 수 없을 정도지. 길가에 서 있지만 대목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네. 지금 자네의 말은 이처럼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어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걸세”
이 말에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자네는 너구리나 살쾡이를 본 적이 없는가? 몸을 낮추고 엎드려 먹이를 노리다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높이 뛰고 낮게 뛰다 결국 그물이나 덫에 걸려 죽고 마네. 이제 들소를 보게. 그 크기가 하늘에 뜬 구름처럼 크지만 쥐 한 마리도 못 잡네. 이제 자네는 그 큰 나무가 쓸모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고을 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 배회하기도 하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게. 도끼에 찍힐 일도, 달리 해치는 자도 없을 걸세. 쓸모없다고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지 않은가”
혜자와 장자가 나눈 쓸모없는 나무에 관한 대화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편에 나와 있습니다. 혜자는 장자에게 자신이 가진 가죽나무가 아무 곳에서 쓸모가 없는 나무라고 탓하면서 장자의 가르침이 옹이와 잔가지가 많고 꼬불꼬불해서 무엇 하나 만들 수 없는 가죽나무처럼 쓸모없다고 탓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장자는 반박합니다. 나무의 쓸모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드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장자는 단지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주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되묻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게 되면 오히려 일찍 죽게 되지만 사람들의 필요에 충분하지 않은 나무는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오랫동안 천수를 누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나무에 대해 쓸모 있다거나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나무에게 갖는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됩니다. 나무는 베어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만드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그 나무 자체에 집중하는 순간 나무는 더 많은 쓸모를 가진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한한 쓸모를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을 ‘쓸모없다’고 말하는 이면에는 우리가 이미 보이지 않게 그어둔 선이 있고 그 선 안쪽에 들지 않을 때 입니다. 그러나 대상을 그 자체로, 즉 고정관념을 버리고 보았을 때, 그의 쓸모는 무한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어떤 목적에 맞춰 수단화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적에 맞게 틀을 씌워두고 그 틀에 어긋나면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타박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명문학교에 가거나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지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타고난 능력대로 자신이 가진 재능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쓸모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구부러져 있다면 굳이 그것을 곧게 펴려 하거나 쓸모없다고 버려둘 것이 아니라 그 구부러진 그대로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복을 찾는 일, 우리의 삶에서 진정 배워야 하는 자세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