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셨다. 괴로운 일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출근을 생각하면 더 괴롭지만 술을 마시는 동안만큼은 잊을 수 있으니 좋았다. 술이 술을 먹을 만큼 나는 괴로웠나 보다. 새벽 3시가 돼서야 집에 들어와 씻지도 않고 잤다. 늦게 출근하면 사유서를 쓰자고 할지도 모른다. 일하려면 푹 자고 일어나야 하는데 지각하는 악몽만 계속 꿨다. 고문당하듯 잠을 자느니 박차고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몸이 비에 젖은 종이박스처럼 매가리가 없다. 7시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린다. 내 이럴 줄 알았지. 10분만 더, 5분만 더하다가 7시 40분이 돼서야 일어났다.
아랫배가 살살 아팠지만, 시간이 없다. 세수만 하고 서둘러 나왔다. 집에서 중계역까지 5분 거리. 뛰었다. 파닥파닥. 머리가 어질어질하니 당이 땡긴다. 개운하게 아침을 맞았던 게 언제였던가. 꿈과 현실의 몽롱한 경계에서 현재의 나로 잡아당기는 나만의 소확행. 바로 900원짜리 커피 우유이다. 갈라진 땅에 단비와 같은 달달한 커피 우유는 혀끝에서 목을 타고 넘어가 뱃속을 두둑하게 하고 머리에 피를 돌게 한다. 중계역 안 편의점에서 커피 우유를 사서 빨대를 꽂아 쪽쪽. 개찰구를 지나면서 쪽쪽. 플랫폼에 설 때까지 쪽쪽 마시며 "어찌 됐든 가보는 거야" 주문을 건다.
그런데 오늘은 여느 날과 좀 다르다. 커피 우유가 쓰다. 사람은 또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건대 입구까지 14정거장을 가야 한다. 30분 거리. 나는 가능한 안으로 들어갔다. 190cm, 덩치 좋은 남자가 버티고 서 있다. 길이 막혀 더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는데 사람들이 밀려 들어온다. 지하철 안, 탁한 공기가 손오공의 머리띠같이 숨통을 조여온다.
"하기 싫어요?"
"네! 하기 싫어요!"
이제 막 팀장 딱지를 단 팀장과 싸웠다. 경력으로 치자면 애기애기한 팀장인데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무사안일에 책임 의식 없이 자기 일을 떠넘기려고 한다. 여기서는 신입이지만, 10년이 훌쩍 넘는 경력으로 이 바닥에선 할머니뻘이다. 참고 참으며 열심히 일하면 더 만만히 보는 게 관리자들의 속성이다. 내가 편하고 동료가 편하고 그래서 일하기 좋은 회사를 만들려면 요구할 건 요구하고 입바른 소리를 해야 한다. 너무 당당하게 하기 싫다고 하니 팀장은 기가 막혔는지 말을 잇지 못한다. 이때다 싶어서 도망치듯 퇴근했다. 그리고 팀장을 안주 삼아서 친구와 술을 마셨다. 욱해서 저지르긴 했는데 대범한 성격은 아니라서 팀장이 복수하면 어쩌지. 그래도 팀장인데 체면을 살려줄 걸 그랬나. 출근해서 얼굴을 어떻게 보나. 소심함에 전전긍긍이다. 꿀렁!
이것은 화장실 신호인데. 아차. 술을 그렇게 마시고 우유를 마시는 게 아닌데. 후회해도 소용없다. 재빨리 뱃속에서 타전해 온 신호를 해석한다. 회사까지 갈 수 있나. 중간에 내려야 하나. 내려야 한다면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하나. 모스부호를 타전한다. 따다 따다. 화장실을 해결하고 가면 지각이다. 따다 따다. 이 정도면 참을 수 있다. 따다 따다. 사유서. 따닥! 참아야 한다! 분명한 목표가 생기니 전투력이 상승한다. 숙취로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든다. 손잡이를 꼭 쥔다. 사가정역, 이제 반 왔는데 발 디딜 틈이 없다. 갈 길이 먼데 뱃속에서 자꾸 쿵쿵한다. 이제라도 내려야 하나. 지하철이 쿠웅쿵 흔들거린다. 잘만 계산하면 지각없이 화장실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사가정역 어디에 화장실이 있는지 모른다. 7호선은 지하 깊숙이 있다. 화장실이 개찰구 밖에 있다면. 그렇다면 난 나를 믿어야 한다. 그래. 건대입구역까지 버티는 거야.
팀장 보는 앞에서 박차고 나왔지만, 진짜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면 먹고살 일이 까마득하다. 글을 쓰면서 돈을 벌기엔 이만한 자리가 또 없다. 요구할 거 다 요구하고, 할 소리 다 할 수 있게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그걸 물거품을 만들 수는 없다. 다른 데서 이 지난한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면.. 손오공 머리끈이 부릉부릉 떨리며 머리를 조여온다. 내가 알아서 그만두도록 괴롭히는 저질일까? 안되애 그러기 전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맘에도 없는 말이지만 맘에 있는 말인 양 나를 속여서 진짜 죄송하다고 굽신거려야 하나. 배가 살살 아프다. 덜덜덜. 지하철이 요동친다.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어 온다. 쿨럭. 멀리서 여자가 기침하니 저기서 남자가 기침한다. 기침이 지하철 먼지와 함께 공중을 날아다닌다.
"밀지 마세요."
"니가 먼저 밀었잖아."
"내가 일부러 밀었어요? 밀리는 거 못 참겠으면 택시를 타요."
"젊은 년이 싸가지 없게. 내가 너만 한 딸이 있어!"
"아줌마 딸한테도 이러세요? 젊은 년이라니요. 젊은 년이라니요!"
아. 시끄럽다. 주먹 놔두고 왜 말로 싸우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간다. 숙취가 계속 올라온다. 바늘이 고막을 콕콕콕콕 찌르는 것 같이 귀가 아프다. 아. 지옥이구나. 지옥이 따로 없구나. 아침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돈을 얼마나 번다고. 이런 개고생을 해야 하는가. 다 때려치우고 산에 들어가고 싶다. 그러려면 또 돈이 필요하다. 더러운 자본주의. 쿠르릉 쿵쿵. 배가 빵빵하게 부어오른다. 항문으로 향하는 압력이 화산폭발 직전이다. 화산이 터지면 여기는 그야말로 생지옥이 된다. 페이스북, 트위터, 포털 메인, 9시 뉴스에 “7호선 설사녀"로 등극.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하다. 입술을 깨물고 참는데 오른쪽 눈에 눈물 한 방울이 고인다. 꾸웅쿵! 중곡역에 도착하고 지하철 문이 열린다. 지금이라도 내려야 한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나갈 길이 없다. 나는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공상 속으로 도피한다.
오늘은 로또를 꼭 사야지. 내가 로또 1등에만 되면 빚 청산하고 산속에서 글만 쓰고 살 거야. 지리산 중턱에 오두막 같은 집 짓고. 텃밭에다가 상추, 방울토마토, 오이, 고추 심고. 마당에 진돗개 풀어놓고. 산고양이 밥 주면서 내가 그러고 살 거야. 쿵. 지하철이 갑자기 멈춰섰다. 어.어. 짧은 탄신이 연발 터지고 사람들이 지하철 진행 방향으로 쭈욱 밀린다. 이 지하철을 생지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이들은 알까. 왼쪽 사람이 왼쪽 배를 찌르고 190cm 거구가 엉덩이를 친다. 으윽. 울음이 터질 것 같다.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쿵쿵. 지하철이 요동친다. 몸이 비비 꼬인다. 무릎이 꺾인다. 으윽. 몸이 찢기는 고통이다. 그러나 여기서 무너질 순 없다. 40살,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요단강까지 갔다가 살아온 나다. 흐윽. 항문이 열릴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다. 안되애. "하느님, 예수님, 성모마리아 님, 크리스티나 성녀님, 돈 보스코 성인님, 프란체스코 성인님,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저에게 힘을 주세요."
드디어 건대입구역 도착. 지하철 문이 홍해 바다 같이 열린다. 항문을 향해 진격하던 적군이 주춤한다.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에스컬레이터만 올라가면 바로 화장실이다. 정상에 다다를수록 고통 강도는 커지는 법이다. 깔딱고개를 넘어야 비로소 정상에 설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 깔딱깔딱. 눈앞이 점점 노래진다. 저 멀리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들린다. "자고로 고통은 더 큰 고통을 만나면 잊히는 법이다. 온몸의 무게를 발끝에 실어 피가 쏠리게 해라." 아버지는 내가 힘들 때마다 말씀하셨다. 네가 아빠가 없냐, 엄마가 없냐, 오빠가 없냐, 동생이 없냐.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덜덜덜. 7호선은 아주 깊은 땅속에 있다. 에스컬레이터 끝에 다다르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ㅡ 서울 지하철역 일부 에스컬레이터의 속도가 느려진다 합니다. 국민안전처는 이달부터 전국 지하철 중 일부의 에스컬레이터 속도를 분당 30m에서 25m로 느리게 조정하겠다고 최근 발표했습니다. 에스컬레이터 속도가 너무 빨라 노인들이 넘어지고 다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몇 년 전 뉴스 내용이다. 고령화 사회가 이렇게 내 발목을 잡는구나. 이게 다 팀장 때문이다. 팀장만 아니었으면 술을 마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일 화산이 폭발하는 대형참사가 일어난다면 팀장을 처단할 것이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적군의 진격을 또 막아냈다. 그래 이때다. 드디어 에스컬레이터 정상에 오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제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아. 마지막 관문. 화장실에 줄 서 있는 사람은 없을까?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후읍후읍 침착하려고 애쓴다. 급하다고 서두르면 바지 훅이 안 풀린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에 와서 무너질 수 없다. 초집중하고 됐다! 우르르 쾅쾅 천둥·번개 소리가 아니다. 파바박팍팍. 불꽃놀이의 향연이다. 살았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볼일을 제때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잠시 생각하고 나는 또 뛰었다. 하악하악. 화장실에서 지체한 시간만큼 또 뛰어야 한다. 7호선을 구한 영웅인데 팀장과의 마찰도 잘 해결할 것이다. 나는 달려라 하니처럼 뛰었다. 퉁퉁 부은 얼굴에 찬바람이 싸다귀마사지를 해준다. 쿨럭! 과음해서 그런지 감기 기운이 돈다. 이럴 땐 뜨끈한 쌍화탕이 "나의 소확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