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고로호 Dec 31. 2020

친절은 어느 곳의 별이 되었을까

공무원 회상기 #20

요즘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 자주 친절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꾸밈없이 다정한 말투에 상냥한 목소리, 마스크를 뚫고 나올 것 같이 환한 미소까지 스스로 보기에도 꽤 친절하다. 언제부터 자타공인 친절한 사람이 됐을까 배경을 살펴보다 강력한 원인을 하나 발견했다. 내 안에 숨어있던 친절이라는 싹이 움튼 건 공무원이 되고 난 후의 일이었다.


관공서에서 언감생심 친절 따위는 기대하지 못했던 관선의 시대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만큼이나 케케묵은 과거가 된 지 오래다. 지금, 친절은 사회적으로 사랑받는 미덕이며, 공무원들에게 상시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다. 기본적으로 공무원에게는 친절ㆍ공정의 의무 있다. 국가공무원법은 제59조에서, 지방공무원법은 제51조에서 공무원은 국민, 주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친절하고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로 규정한다.


신규 공무원에게 친절 역량강화를 위한 채찍의 힘은 매서웠다. 처음 참석한 주민센터 민원대 직원들을 위한 교육에서부터 정신이 번쩍 났다. 교육 시작 전 구청에서 나온 6급 계장이 각 동의 불친절 사례를 열거하며 질책했다. 분위기가 얼마나 날카로왔던지 이제 막 새로 민원을 보기 시작해서 불친절을 실현할 기회조차 없었던 나까지 호되게 혼나는 기분이었다.


아침마다 업무 시작 전에 전 직원이 모여 큰소리로 전화 응대 매뉴얼을 외우던 시기도 있었다. 민원인을 가장한 전화점검이 수시로 이뤄지고 전화 내용이 녹음되고 점수가 매겨졌다. 만족스럽지 못한 점수가 나오면 직원회의에서 동장님의 꾸지람이 떨어졌다. 직원들이 본인의 업무는 뒤로 한 채 순번을 정해 친절히 모시겠다는 어깨띠를 메고 현관문 앞에서 민원을 맞기도 했다. 친절교육과 점검은 어느 곳에서나 필수지만 내가 공무원이 되고 나서 몇 년 동안은 유난히 더 잦은 점검이 있었고 더 호들갑스럽게 그 결과에 대한 피드백이 있었다.











친절직원을 표창하고 각동의 친절을 전담하는 직원을 선정해서 위크숍을 하는 등 채찍 맞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당근도 주어졌지만 동기부여가 될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친절이 우러나오도록 고무하는 게 아니라 불친절로 민원이 접수되기만 하면 가만히 안 둘 거라는 삿대질에 마음이 위축됐다. 민원이 많은 업무환경, 각종 행사과 잡일에 시달리는 현실,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무조건 불친절로 몰아가는 악질적인 민원인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고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불친절 민원이 구청장의 재선에 누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분위기에 가끔은 비뚤어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친절의 싹이 무럭무럭 자란 것은 눈만 뜨면 친절을 부르짖는 강압적인 환경 덕분이 아니었다. 친절은 현장에서 사람들과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도구였다. 처음에는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웃음기를 거두고 무표정으로 방어하기도 했다. 마음이 아팠던 때에는 기계적으로 민원인을 대했던 시절도 있었다. 막무가내인 민원인과는 싸우기도 했다. 한때는 나도 사무실에 큰소리가 울려 퍼지게 만든 민원 유발자였던 시기가 있었다. 열심히 싸우고 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일관된 친절을 베푸는 게 나 자신에게 좋았다. 안 그래도 웃을 일 없는 사무실에서 친절을 베풀며 타인에게 미소를 짓는 일이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농담처럼 좋아했는데 이걸 공무원이 되어 인생 좌우명으로 삼으며 실천할 줄은 몰랐다.


친절은 중독적이다. 비록 업무상 의무라 해도 계속 친절을 베풀다 보면 그 행위 자체에 심취할 때도 생긴다. 강인한 체력도 굳은 마음도 곧은 심지도 없는 사람에게 친절은 유일한 장점이 되기도 한다. 친절은 실수나 불편에 대한 면죄부 역할도 한다. 기계가 고장 나 민원인을 오래 기다리게 하거나, 요건이 갖춰지지 않아 민원인을 돌려보낼 때 먼저 행한 친절의 말과 태도가 많은 사람들의 화를 가라앉혔다. 온전히 실리적인 목적에서 나는 친절한 공무원으로 거듭났다.











보답받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친절공무원에 입문한 단계에서는 매사가 보상이 된다. 공무원이 이렇게 친절하다니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과분한 칭찬에 어깨가 으쓱하고, 친절한 말이 친절한 미소로 되돌아올  감동받는다. 다른 창구에서 화가  민원인이 나의 응대에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온순한 얼굴을 되찾는 일이라도 생기면 친절의 힘이 마법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 하늘까지 닿을  뻗어나가는 친절 꿈나무에게도 이윽고 사춘기가 찾아온다.


두 손으로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민원서류를 발급하는 동시에 목을 꺾어 뺨과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끼고는 전화 문의를 그냥도 아니고 친절하게 해결했는데 더 궁금한 사항이 있냐는 마무리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한 친절 점수를 받았을 때. 친절하다는 소리는 많이 듣는데 정작 친절 표창은 한 번도 받지 못했을 때. 민원인의 폭언에 그러지 마시라고 목소리를 같이 높인 행동이 정당한 대응이 아니라 불친절이 될 때. 친절은 주관적이며 계량할 수 없다는 점이 족쇄가 될 때 그동안 베푼 많고 많은 친절이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건지 허무했다.


친절을 둘러싼 당근과 채찍도, 순수한 기쁨과 허무함도 다 내려놓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친절공무원이란 키워드를 인터넷에 검색한 순간 공무원들의 사진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친절공무원으로 표창받은 동기들의 어색하면서도 앳된 사진도 그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내 친절은 어디 갔냐며 보상받지 못했다고 서운해할 필요가 없었다. 제대로 보상받았다가는 평생 공무원을 할 것도 아니면서 친절공무원이라는 타이틀을 단 내 사진이 영원히 인터넷을 떠돌 뻔했다. 친절한 공무원으로 인정받고 지역뉴스까지 오르는 일은 영예로운 일이지만 내게 친절은 희미한 기억, 순간의 따뜻한 기분, 찰나의 만족으로 족하다. 이제는 법으로 친절할 의무 따위는 없지만 몸에 깊이 베인 친절이 어느 때고 튀어나올 때마다 공무원 생활이 남긴 작은 유산이라 여기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무원 하다 사라지고 싶었던 사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