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으로 엉겨오는 거리를 서둘러 걷는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 줄지어 선 여행자들의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발걸음만은 서두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짧은 스커트 아래로 미끈하게 뻗은 다리가 예쁜 숙녀가 다가와 별이를 쓰다듬는다. 언덕 위 푸른빛 작은 등대에 불이 켜지고, 하루를 챙기는 분주함이 골목 안으로 스며든다.
"반려견 동반 가능한가요?"
"네네. 안고 계시면 됩니다."
카페를탐색하러 간 친구는 시야에서 사라졌는데 비밀스러운 문 하나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문을 밀자마자 카페 통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바다 풍경에 탄성을 질렀고,창가에 앉아 몇 시간을 몽유함에 빠져들었다. 여과 없이 쏟아지는 햇살에 여행자도편하게 마음을 꺼내 두었다.
윤슬은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반짝거렸고,카페에서 들려오는 젊은 연인의 밀어에 섞인 백색소음은 정겨웠다. 연유처럼 부드러운 목 넘김과 시크한 바디감이 돋보이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오물거릴 때마다 흑백 추억이 피어올랐다. 본 메뉴보다 서비스를 더 많이 챙겨주는 쥔장(카페 사장님 대신 이 말이 살갑다)의 단아하고도 정갈한 언어와 친절에 취한 친구 곁에서 나는 말없이 별이를 쓰다듬었다.
그때 한가족이 들어왔고 젊은 여자가 한참을 부른 후에야(나를 계속 불렀다는데 못 들었다) 나는 몽롱함에서 깨어났다. 생전 보채지도 않고 사람도 친구도 좋아하는 착하고 애교 많은 별에게 눈을 떼지 못한 모양이었다.별이는 카페 손님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우린 '하늘 마 스무디' 한잔을 더 주문했다.
"반려견 키우는 게 힘든가요? 돈은 많이 들어가요?"
한꺼번에 몇 가지 질문을 하는 여자,
"연봉이 1억이 넘지 않으면 키울 생각 아예 하지 마세요;(내가 연봉이 그리 된다는 것이 아니라 케어 비용이 후덜덜함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키우던 아이도 1년여 투병생활 할 때 이러다 파산하겠다 싶을 만큼 경제적 압박을 느꼈었다) 그리고 떠나는 날까지 가족처럼 케어할 자신 없으면 아예 키우시지 않는 게 좋아요. 생명이 있는 아이들을 유행처럼 키우다 버리고, 병들면 귀찮고 돈 많이 들어간다고 유기하는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여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제발 키우자며 아빠에게 매달리는 남매의 눈빛은 간절했다.
갑자기 '찰칵, 찰칵' 소리와 함께 목 뒤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고, 살짝 고개를 돌렸을 때 파란색 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의 스마트폰이 급히 창밖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하늘마 스무디는 달콤함과 상큼함의 정점을 찍으며 기분 좋게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했고 쥔장 여자가 리틀 포레스트 주인공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일몰을 보고 가자며 다시 들르기로 하고 간장게장 맛집을 찾아 달린다.
"반려견 동반 입장되나요?"
"네. 짖지 않고 대형견 아니면 구석에서 드시면 돼요."
전화 통화를 할 때 구석에서 먹으라던 간장게장집 사장은 VIP석 같은 자리를 통째로 내어준다.
몽실한 한낮을 떠밀며 잿빛 어스름이 찾아왔고 우린 급하게 다시 언덕을 넘었다. 다행인지 카페엔 손님이 없었고 낮에 앉았던 창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바다 빛은 붉어졌다. 유람선이 지난 자리에 작은 파도가 일고 갈매기 한 마리가 석양 속으로 날아오른다. 파스텔톤이 선명한 카페 아래 벽화마을 지붕 끝으로 하나 둘 어둠이 모여든다. 해상 케이블카는 공중에 떠다니는 대형 반딧불이 같다. 헝가리 무곡 제5번이 흐르고 여행자의 시간이 이대로 정지되길 소망한다. 커피가 바닥을 보일 즈음 유자와 청귤을 섞어 만든 차가 우리 앞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