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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좋아하는 일을 미뤄둘 수 있는 용기

어떻게 자퇴까지 사랑하겠어, 영화를 사랑하는 거지

자퇴라는 소재가 '이상'이라는 매거진의 첫 글을 장식하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어쨌든 나는 다니던 대학원을 자퇴했다. 자퇴 신청을 완료한 이번 주로부터 거슬러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꽤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나야겠다.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FLYING PLASTIC BAG)


내 인생의 모토이자 브런치의 닉네임, 필명이나 예명, Personal Brand 등을 담당하고 있는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는 크고 작은 삶의 기로에서 내가 조금 더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나에 대한 상징과 기준, 의미였다.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는 정처가 없고 그저 바람의 방향에 몸을 맡긴 채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목적지가 없이도 바람을 따라 다양하고 풍성한 경험을 하며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기에 나는 스스로를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라 칭하고 살아왔다.


출생과 함께 무전여행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빈 손으로 왔고 목적지는 없었다. 수없이 많은 기착지를 지나며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때로는 강도를 당하기도 한다. 다음에 발을 디딜 도시가 얼마나 위험할지 미리 지도라도 펴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오가며 마주한 나와 같은 무전여행자들의 여행담을 제외하곤 어떤 힌트도 얻을 수 없다. 그들의 말이 진실일지도 알 수 없다는 것도 여정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은 곧 모든 것을 믿어도 된다는 말과 같기에, 나는 그렇게 내가 당장 행복할 수 있는 기착지로 향하곤 했다. 그 너머에는 산적이 도사리고 있거나 물 한 방울 없는 광야만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지금 내 눈앞에 선 어떤 도시도 마찬가지이기에 나는 현재가 늘 중요했다.


처음 타 보는 놀이기구, 목적지 없는 여행, 스포일러 없이 보는 반전 영화,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 이 모든 경험은 나의 다음을 알지 못한 채 시작되기에 이를 통해 얻는 희열(혹은 슬픔과 분노)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알지 못함'은 긍/부정에 관계없이 삶과 순간마다의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누리게 한다.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가 나무에 걸렸다면 더 높은 곳에 머무르며 더 넓은 세계의 변화를 보다 오래 지켜볼 수 있게 되고, 진흙밭에 떨어져 더 이상 날지 못한다면 그때부턴 하늘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미래가 중요했다면 일말의 희망조차 남지 않았을 그 순간도, 현재의 시점에선 무엇이든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내 행복을 거는 것은 나에게 큰 도박이고, 그래서 모든 선택이 지금의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비닐봉지 연대기


그런 학생이었던 나는 공부보단 포토샵을 다루는 일이 더 즐거웠고, 영어가 싫어 도망치던 나는 뜬금없이 러시아어를 배우겠다며 일주일에 세 번씩 서울까지 왕복 3시간의 거리를 오고 갔다. 영화가 좋았던 나는 커리어에 쓰일 일이 일절 없을 영사기능사 자격을 취득했고, 졸업장에 문/이과/예체능을 모두 한 번에 남겨보고 싶다며 소프트웨어를 세 번째 전공으로 덜컥 신청하기도 했다. 앞날을 조금만이라도 내다볼 수 있었다면 하지 않을 수 있을 선택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지금에서는 미래의 내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미래의 나 또한 그때의 내 행복을 찾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복의 총량은 현재의 행복들로 켜켜이 쌓여왔다.


그런 기준으로 선택한 또 한 곳의 기착지가 대학원이었다. 영화를 업으로 삼을 생각이 없었던 나였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던 영화를 더욱 깊이 있게 보기 원했고, 그렇기에 영화 실기 전공이 아닌 영화 이론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보다 더욱 오래 그리고 깊이 영화를 연구해 오신 교수님과 연구자들, 그리고 대학이라는 공간이 갖춘 인프라는 영화를 공부해 나가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영화를 홀로 감상하기에만 그쳤던 날들과 비교하자면, 나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의 다음 선택지가 줄어드는 때가 찾아오고야 말았다. 대학원 등록금은 차치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그 생활을 유지할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학부 때부터 학자금과 월세를 비롯한 생활비 전액을 내 힘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기에 어쩌면 대학원은 꽤 나에게 과분한 사치일 수 있었다. 장학조교로 일하면서 근로자이자 학생인 신분이 되어버려 나에 대한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조차도 끊겼고, 월 5만 원씩 넣던 주택청약도 해지하고서도 생활비가 모자라 대출까지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이 순간만큼은 보기 그 자체가 지워져 버렸기에 더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대학원과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자며 휴학을 하게 되었고,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는 꽤 오랜 시간 느티나무 꼭대기에 걸려있게 되었다.


그 이후, 프리랜서로 디자인 외주를 하기도, 외주를 하던 회사에 계약직으로 채용되어 잠시 일하기도 했다. 그다음으로 취업한 곳이 IT 스타트업이었다. 정리하는 것을 좋아해서 정리에 도움이 되는 어플리케이션을 이것저것 설치하고 사용해 보기를 좋아했지만,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스타트업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 업이 될 줄은 생에 상상해 보지도 못했다. 처음 인턴으로 일한 곳은 심지어 AI 스타트업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콘텐츠 에디터로 일하게 되었다. 콘텐츠 기업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재택근무 혹은 유연근무가 거의 불가능한 업계였기에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선 IT 스타트업은 나에게 차선책이었다. 더불어 마케팅 콘텐츠를 작성하게 될 줄 알며 취업했던 내가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은 AI 관련 교육 아티클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머신러닝 개발자분들이 작성한 기획안을 내가 공부하여 나와 같은 문과생의 눈높이로 글을 풀어내야만 했다. 마케터가 되긴 싫어 콘텐츠란 이름만으로 지원했던 직무는 그렇게 나를 예상치 못한 새로운 여정으로 이끌었다.


끝이 아니었다. 6개월 간의 인턴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나갈 무렵, 사이드 프로젝트 제안이 들어왔다. IT 업계를 이해하는 것도 꽤나 벅찬 일이었고, 돌아가야 할 학교도 있었기에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스포일러는커녕 예고편도 보지 않은 영화의 2막처럼 그땐 알지 못했지만 이 프로젝트가 결국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되고야 말았다. 함께 프로젝트를 구축해 나가는 사람들을 믿을 수 있었고 즐거웠고 배우는 것도 많았다. 퇴근 후와 주말을 이용해 우리가 구상하던 프로덕트를 시각화해 나갔고, IT에 일자무식이던 나는 어느새 선명해진 청사진 앞에 도달했다.


프로젝트가 프로덕트가 되고 프로덕트는 기업이 되었다. 영화, 엔터테인먼트, 브랜드, 콘텐츠를 수소문하던 내가 마케팅, IT, 창업이라는 전례 없는 분야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인턴이었던 나는 일주일 뒤 이름 옆에 공동창업자라는 타이틀이 걸린 사람이 되었고, 이 여행에 동행까지 생겼다. 나는 그런 무거운 타이틀은 거절하려면 거절하지 달고 싶었던 적은 없었고, 금전적인 부분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에 이 일을 시작하려면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이유가 필요했다.


한 해에도 많은 숫자의 스타트업이 탄생하고 저마다 각자의 북극성을 따라 걷는다. 아니, 달린다. 대기업에 비하면 뭐 하나 나을 리 없는 현재의 조건들이지만, 성취와 성장, 미래에 주어질 보상이 있기에 그것을 원동력으로 쉴 틈 없이 내달린다. 하지만 나에게 그 명분은 설득력이 부족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미래를 기대하며 지금의 내 행복을 미뤄두라니. 쉬는 날이면 무선충전기가 달린 침대에 내내 붙어있으며 완충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내가 현재도, 미래도, 시간도, 공간도 불확실한 스타트업의 로드맵에 한 점이 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때 내가 이곳에 완전히 합류하기로 결정한 것은 네 가지 이유였다. 첫째는 이보다 더 좋은 사람과 일할 기회가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우선은 모두가 능력 있고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나를 위해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능력 있고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능력 있고 뛰어난데 자신만큼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은 흔치 않기에, 하고 싶은 일보다 좋은 사람과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한 나는 적어도 이것 만큼은 고민 없이 판단할 수 있었다. 둘째는 깊이 있는 한 가지 일보다는 다양한 일을 벌이고 그것을 서로 잇는 일을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조직의 규모상 스타트업은 한 사람이 맡아야 하는 직무의 범위가 비교적 넓기에 깊이는 전문가에 비해 얕더라도 오히려 초기일수록 그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는 Generalist의 역할을 필요로 했다. 다양한 영역을 넓은 관점에서 통일성 있게 쌓아 올리기를 좋아하는 나였기에 스타트업은 매력 있는 선택지였다. 셋째는 스타트업은 백지에서 시작한다는 점이었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도화지에 내가 직접 기초부터 쌓을 수 있다는 것, 곧 내가 설계하는 언어가 공용어가 된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문법을 수정해 나가기를 어려워하는 나로서는 처음부터 내가 나만의 방법으로 이상을 펼쳐나갈 수 있다는 점이 나를 스타트업으로 이끌게 했다. 마지막 이유가 결정적이었다. 학교로 돌아갈 때가 된다면 그때에도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다는 것. 학교를 휴학할 때부터 그토록 찾던 일이었다. 현재의 행복을 위해 최상의 선택지였다.


그렇게 1년을 예정했던 휴학은 3년으로 길어졌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행성의 시간과 우주선 안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 것 마냥 나의 3년은 1년처럼 흘러가버렸다. 소진할 수 있는 휴학 기회는 다 사용한 상태였고, 자퇴를 하거나 복학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퇴를 하지 않았다, 아직은. 복학을 했다. 좋은 사람들과 순간마다 새로움을 느껴가며 3년 가까이 일해왔지만 자퇴를 하면서까지 나에게 설득력 있는 선택지가 있지는 않았다. 그만큼 영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회사는 여전히 영화를 공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처음 이야기했던 대로 일주일 중 사흘은 회사를, 이틀은 학교를 가며 밤낮 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몸은 고됐지만 하루가 하고 싶은 일들로 가득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업무가 끝나면 그 자리에 남아 레포트를 쓰거나 논문을 읽기도 하고, 반대로 학교에 있으면서 수시로 슬랙을 체크하기도 했다. 수업은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했고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라는 교수님도 계시지 않았다. 늘 가치 있는 배움을 전해주시던 분들이셨다. 어디에 가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나의 두 가지 신분이 나를 바쁘게 만들면서도 좋은 시너지를 내었다.



소망의 적분법


그러나 나는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간과한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의 총량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넘어설 때였다. 말 그대로 '24시간으로 모자라'였다. 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업무가 마무리되지 않았고, 주말 내내 책을 읽어도 과제가 마무리되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처음부터 존재했기에 당연한 것이었지만 일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회사에서의 일상과 업무, 사람과 내 직무 모두 만족스럽고 인정받았기에 수단이었던 나의 일이 어느새 마음 가운데 커다랗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정해야만 했다. 한 학기가 지났고 올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회사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많아서 머릿속이 폭주기관차 상태였다. 늘 다른 어떤 팀원보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마인드로 나를 믿어주었기에 이전보다 더 많은 일들을 이것저것 벌여보기 시작했다. 고민이 불어났다. 나는 어떤 일을 더 좋아하고 있을까. 해답을 내리게 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도 그 일이 즐거울까?'


'대학원이 아니라면 스스로 그 공부를 해낼 만큼 그것이 즐거웠을까?'라는 질문에 나는 확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콘텐츠 기업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뜬금없는 IT 스타트업에서 실행하고 있는 지금 나는 즐거웠다. 어떤 기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이 일에 만족한다 답할 수 있었다.


내 버킷리스트들을 하나씩 지워가기 위해 그 소망들을 한 겹 한 겹 쌓아 올려 모두를 계산했을 때, 지금 일하는 이곳이 현재의 내 행복에 더 커다란 결괏값을 도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을 때는 몰랐지만 이곳은 나의 느티나무였고, 나는 느티나무에 걸린 비닐봉지이자 내가 알지 못한 더 큰 세계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비닐봉지였다. 언젠간 더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영화의 세계로, 콘텐츠의 세계로 날아갈지 모르지만 지금은 여기서 그저 이 세상을 관망하고 있는 것이 좋다. 생각보다 그 변화가 다채롭기에.



바빌론과 파벨만스


그래서 얼마 전 보았던 <바빌론>은 나에게 큰 의미였다. 복학 이후 6개월 간 배웠던 영화의 순간들이 내내 보였고, 내가 얼마나 영화의 순수함을 사랑했는지 충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 도달하지 못하기도, 도망치기도 혹은 벗어나야만 하기도 했던 주인공의 여정은 그 스크린 안에 나를 이입시키고 몰입시키기도 했다. 좋아하니까 포기한다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다시금 붙잡을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미뤄둔다고 했다. 좋아하기에 미뤄두는 것이다. 잠시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기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파벨만스>가 어제 개봉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라니. 그가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고 있을지 한껏 기대된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좋아해서 결국 자신이 그 존재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사람들이다. 재능, 열정 혹은 그 둘 모두로. 내가 다시 영화의 옷자락을 붙잡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꿈을 꾸며 무엇을 만들어내려고 할지. 다시금 나아갈 기착지가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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