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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혹시나 몰라서 언젠가는

1-1-3.에 대한 보충

’혹시 모르니까‘라는 어구는 생각보다 무섭게 다가온다. 나의 가방에는 비가 올 때를 대비해 작은 우산이 상비되어 있고, 쉽게 방전되지 않을 20000mA의 보조배터리, 카페에서 휴대폰을 거치해 두기 위한 스마트폰 스탠드, 읽으려고 마음을 먹어 둔 책 한 권 등이 들어 있다. 혹시 모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기에, 나는 종종 이후의 모든 경우의 수에 미리 대비하고 그 경우가 눈앞에 찾아올 때까지 감당해야 할 모든 비효율을 견딘다. 찾아오지 않는다면 영원히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을. ‘언젠간 볼 것 드라마’, ‘언젠간 들을 음악‘, ’언젠간 다시 꺼내 볼 사진‘, ‘언젠간 쓸 물건’. ’언젠간‘이라는, 의미에 기약이 명시되지 않은 이 단어에는 모든 존재마다의 존재 이유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힘이 깃들어 있다.


종류는 비슷한 것끼리, 범위는 넓음에서부터 좁음으로, 마치 스펙트럼과 같이 모든 것을 배열하는 나의 체계는 곧 일과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PPT도 컨셉과 레이아웃이 잡혀야만 내용을 채울 수 있었고, 졸업장에 문과/이과/예체능을 모두 기입하고 싶었으나 수강신청 실패로 제3전공을 포기해야만 했던 내 대학 졸업장의 보이지 않는 균열은 지금도 종종 나를 굉장히 찝찝하게 만든다. 이 정도면 숫자와 저장, 수집에 대한 집착은 당연한 것이겠다. 스트리밍을 이용하면서도 대용량의 아이팟 클래식에 그 음악들을 mp3 파일로 10년 넘게 차곡차곡 쌓고 있는 것을 보면, 나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거나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놓쳐서 생긴, 영원히 메우지 못할 그 빈틈에 불안정을 느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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