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에 떠도는 멘사테스트는 전부 사기였다.
※ 주의 : 4년 만의 회상이라 기억의 왜곡이 있을 수 있음
2020년 11월 멘사테스트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동안 중지됐던 멘사테스트가 간만에 재개된 시험날이었다.
목욕재계를 하고 멘사시험 테스트장 서울지부에 도착했는데 웬걸, 아직 아무도 안 왔다.
인생 첫 정식 멘사테스트 시험인 만큼 잠시 눈을 감고 태초의 에너지를 모으는 시간을 가졌다.
IQ테스트를 보게 된 계기?
별 거 없었다.
한때 문제적 남자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보곤 했는데, 패널들이 풀기 힘들어하는 문제들을 내가 가끔 몇 초 만에 쉽게 풀어낼 때 ‘나도 설마 멘사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 있다. 그때 패널과 게스트에게 자주 붙던 IQ 156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뭔가 멋있게 느껴져서 나도 한 번쯤 달아보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다만 테스트를 본다고 주변에 떠벌리고 다니진 않았다. 이건 혹시라도 떨어질 때를 대비한 조치였다.
시험시간에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고 시험장 입장이 시작됐다. 철저한 본인확인을 위해 마스크를 잠시 내려야 했다. 코로나를 핑계로 대리시험을 꿈꿨을 누군가에겐 식겁했을 상황이었다.
차례대로 계단을 올라가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대기업 인적성 시험도 이보다 떨리진 않았다. 보통의 시험은 통과하기 위한 절대적인 공부의 양이 있고 그걸 얼마큼 충족했느냐에 따라 자신감이 달라지는데 멘사테스트는 준비할 공부랄게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온라인에 떠도는 멘사테스트가 있긴 하지만 그게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던 이유는 뒤에서 설명할 예정이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멘사시험을 보는 걸까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좌우를 둘러보니 대부분 보통 사람들로 보일 뿐이었다. 어리게는 대학생부터 많게는 동네 치킨집 사장님 느낌까지 연령대는 다양했다. 성별도 특별히 한쪽으로 쏠려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딱 한 명. 왼쪽 대각선 앞에 앉은, 머리를 빳빳이 공들여 세운 남자가 눈에 띄었다. 가끔 90년대 자료화면에나 나올법한 명동 힙스터의 느낌이랄까.
주황색이 살짝 들어간 반무테 색안경. 너무 촌스러워서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옛스러움은 세기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나도 중학생 때 선생님 몰래 하늘색 반무테 색안경을 쓰고 다니다가 교무실에 끌려가본 적이 있긴 한데 그건 너무 옛날일이었지만.. 이건 너무 2020년 아니던가? 게다가 보통 반무테는 아래가 무테인데 이 사람이 쓴 안경은 특이하게도 위쪽이 무테였다. 패션파괴의 종합 선물세트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많으니 혹여 지하철에서 마주쳤다면 독특한 패션이네 하고 지나갔을 텐데 멘사테스트하는 곳에서 만나서 그런지, 다리를 꼰 채 펜을 돌리는 여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이유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인데 알고 보니 개쩌는 능력자인? 생각해 보면 거기서 오는 위화감이었다.
모 아니면 도
성격이 독특하지만 천재로 불리는 일론 머스크 같은 천재류이거나 혹은 그냥 겉멋 든 nerd이거나.
예를 들면 어차피 떨어질 거 서울대 한번 넣어보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난, 적어도 그때까진 그를 얕잡아봤다.
스탭으로 보이는 사람이 잠시 앞에서 시험에 대한 브리핑 같은 걸 진행했다.
나눠준 싸인펜 하나 빼고는 모두 가방으로 집어넣으라고 했는데, 이 싸인펜이 멘사테스트 기념품으로 유명한 그것인가 보다 했다. 멘사테스트에서 떨어지면 응시료 몇만 원과 이 싸인펜을 바꾸게 되는 셈이라던 그 기념품. 나중에 멘사테스트 후기를 찾아보니 그 싸인펜이 나름 유명하다 했는데 난 왜 그걸 버렸을까..
브리핑 내용 중 기억나는 것은 멘사시험은 평생 3번밖에 못 본다고 한 것이다.
만약 한번 봐서 받은 결과가 맘에 안 들어서 두 번, 세 번 시험을 보더라도 결과가 똑같을 확률이 90%가 넘으니 첫 시험에서 잘 보시라는 이야길 했다. 오 이거 좀 쩌는데? 싶었다. (세 번 다) 떨어지면 쪽팔린 일이 되겠지만 어쨌든 멘사테스트 통과하면 3번 안에는 지능을 증명한 셈이 되니까.
하지만 어차피 붙을 놈만 붙을 테니 알아서 하시라는 무표정한 스탭의 말투에 또 한 번 위화감 같은 걸 느꼈다. 사실 조금 쪼랐던 것 같다.
문득 든 궁금증.
"저 스탭들도 다 멘사회원일까?"
멘사 테스트 족보는 사기였다.
시험이 시작됐다. 아차 싶었다.
인터넷에 '멘사테스트'라고 검색해서 나왔던, 시험 삼아 풀어봤던 문제들과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유형은 비슷했지만 읽어야 하는 패턴이 달랐다.
보통은 가로 세로 3x3 세트의 이미지에 8개의 도형이 미리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 하나를 추론해서 맞추는 유형이라고들 했는데 실제 시험은 그렇지 않았다.
문제를 유출하지 말라는 내용에 서명을 했기에 더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아무튼 이런 패턴이 아니었다.
시험시간도 20분 남짓으로 예상보다 훨씬 짧았고 풀어야 하는 문제의 수도 엄청 많았다.
이상하다. 테스트문제는 제한시간이 40분이 넘었었는데,, 문제 수 보고는 망했다는 생각 먼저 들었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론 한 80문제 됐던 것 같다. 무슨 토익도 아니고 문제 수로 압도해서 다 떨구려고 하나 싶었다.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돌려본다고 했는데 역시나 시간은 모자랐고 마지막 2-3문제를 놓쳤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웬걸. 아까 그 패션 테러리스트이자 nerd로 추정되던 그 왼쪽 대각선 앞에 앉았던 색안경의 남자는 시간종료 한참 전에 이미 마킹을 끝내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허세 진짜 못 봐주겠네"라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가 들어갔다. 난이도에 비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몇 문제 풀지도 못한 내 입장에선 여유 부리고 있는 그가 솔직히 꼴사나웠다.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 여유면 아마 모였던 것 같다.
나중에 멘사 모임에서 만나게 되려나?
시험종료 후 스탭들이 시험지와 OMR 카드를 걷어갔고 난 허탈함, 그리고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주변에 멘사 테스트 본다는 얘기 안 하길 천만다행이다라고 여기며 시험장을 재빠르게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멘사 테스트 통과. 운이 좋았다.
시간이 흐르고 발표날이 되어 별 기대 없이 사이트에 들어가서 시험결과를 확인했는데 피가 뜨거워졌다.
처음엔 '결과가 잘못 나왔나?' '점수가 바뀌었나?' 아니면 '샘플이미지인가?' 싶었는데 테스트 결과지에 위에 이름이 써있는걸 보고 내꺼라는 걸 깨달았다. 와 쩐다. 내가 드디어 고지능 단체의 일원이 되었구나. 세상 헛살지 않았네. 대견하다 짜식. 뭐 이런 갖가지 자아도취의 감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생각해 보니 이건 국가공인 자격증도 아니고, 취업에 필요한 증빙서류도 아닌 종이 한 장이었다.
이거 하나 받자고 응시료 내고 시험장에서 20분간 쫄렸던 것을 생각하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시험을 봤을까 금세 현타가 찾아왔다. 내가 어디 가서 멘사라고 얘길 하겠으며, 얘기한다 한들 얻을 것도 딱히 없었다. 그나마 나중에 어디 가서 허세 부리고 싶을 때 안주삼아 얘기할 소재 정도 생긴 것에 전부였다.
자기 객관화가 이뤄지며 평정심이 찾아오고 나서 멘사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 시작했다.
* 멘사의 정의 :표준화된 지능 검사에서 일반 인구의 상위 2% 안에 드는 지적 능력만을 가입 조건으로 하는 고지능 단체다.
* 멘사의 음모 : 전시사태 발생 시 국가에서 따로 관리한다 (???)
* 멘사의 쓸모 : 취업할 때 가산점이 있다 (???)
* 이런 궁금할법한 내용들은 다음번에 따로 포스팅으로 풀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