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향

육지에서 섬으로, 다시 육지로

by 정욱

한때 1년 하고도 10개월이라는 시간을 제주에서 살았다. 섬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이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건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내게 제주도에서의 시간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주 독특하고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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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무 살 이후로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스물이 되기 전에도 내가 살던 동네, 다니던 학교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런 감정을 느꼈으나, 마음속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마음의 고향'에 대한 향수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 이후부터였다. 발단은 군입대였다. 입대는 내가 처음으로 나고 자란 도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떨어져 살게 된 계기였다. 연고가 하나도 없는 낯선 동네에 떨어져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하는 생각조차도 익숙해질 때 즈음, 첫 휴가를 나왔다.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나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신촌으로 향했다. 신촌역 3번 출구를 나와 그 앞에 있던 맥도널드를 6개월 만에 마주했을 때, 나는 신촌이 내 '마음의 고향'이 되리라는 걸 직감했다. 군부대가 있던 이천은 결코 마음을 준 적이 없었으므로,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어떤 도시에 살면서 심지어 온통 마음을 내어주기까지 하면, 다시는 그곳을 낯선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생각에 '객관적인'요소가 개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거기엔 온통 애정을 기반으로 한 비합리적인 생각과 감정들이 판단을 방해하며 끼어든다. 내게는 제주도가 그런 곳이다. 제주도에 살게 되기 전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제주에서 살아보기 전과 살고 난 뒤에 내가 생각하는 섬에 대한 인상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2017년, 제주에 정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를 10년 동안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는데, 내가 그곳에 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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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제주도민이었던 내게 그곳은 더 이상 낭만의 섬이 아니다. 제주는 철저하게 현실의 공간이자,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변했다. 22개월이라는 시간은 제주도에 대한 내 인상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제주에서의 삶 이후로 그 섬을 방문할 때마다, 온통 과거의 나를 좇아 시간여행을 한다. 스물아홉의 내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낯선 서귀포에 정착해 서른 살의 끝자락까지 살며 남겼던 흔적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예전에 자주 갔던 중국집, 동네 친구와 함께 갔던 작은 술집, 누군가와 함께 거닐었던 골목길, 내가 살았던 월평동이라는 작은 마을 등등. 제주를 여행하는 일반적인 여행자라면 절대 가지 않을 장소들을 향하며, 나는 그 '일반적이지 않음'에 대해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때로는 전율하며 즐거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내가 이전처럼 제주도를 철저하게 이방인의 시선으로 다시 보게 될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의 생에서 제주를 현지인도 아닌 여행자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낀 애매한 존재로 바라볼 것이라는 생각만큼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없다. 이 같은 제주에서의 삶 이후로, 나는 여행자들이 여행지에서 살아보고 싶어 하는 그 환상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여행과 삶, 그건 철저하게 분리된 채로 남아있어야 하는 영역이다. 여행이 삶이 되는 순간 그건 여행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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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초부터 2018년 말까지, 제주에서 20대의 끝자락과 30대의 초입을 보내고 나는 다시 내가 살던 도시로 돌아왔다. 그렇게 제주에서 다시 돌아온 지 1년 하고도 3개월이 지났다. 이곳에 다시 돌아온 시간이 아직도 제주도에 머물렀던 시간보다 짧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섬에 있을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의 속성이란 것이 늘 그렇듯 지난 뒤에 바라본 그 시간들은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 가 있다. 1년이 지나고 나니 문득문득, 제주에서 살던 시절이 그립곤 하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소리에 잠에서 깨던 아침,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마당에서 바라보다 잠을 청하던 일, 해가 따사로이 내리쬐는 날 마당에 의자를 갖고 와 일광욕을 하다가 까무룩 잠에 들던 어느 낮, 세상이 온통 평화롭고 조용해서 오로지 나만 있는 것 같던 시간들. 혼자 명절에 어디 가지 않고, 육지에서 섬으로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을 바라보던 기억도 떠오른다.


이렇게 어딘가에 적(籍)을 두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건 슬픔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떠나간 과거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일은 늘 변하는 것들에 대해 속절없이 슬퍼하는 것뿐이므로, 마음을 주었던 곳을 늘려나가는 건 공연히 슬플 일을 더 만드는 일이다. 한때 내 마음을 몽땅 가져가버렸던 대상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거나 없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못 견디게 슬픈 일이다. 마음을 쓰지 않으면 기쁠 일도 없지만 슬플 일도 없다. 살아가면서 마음이 쓰이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아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대로 있기 보다는 계속해서 변하려고 하니까.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의 생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제주도에서 살게 될 기회가 또 올까? 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한때 제주도민이었던 내 삶은 돌이켜보면 꽤나 괜찮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은 정말이지 평화로웠다. 늘 느끼지만, 내 가장 큰 문제는 있을 때 그 소중함을 모른다는 점이다. 항상 다시 돌아가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하고 후회한다. 신은 왜 인생을 2회 차로 만들어놓지 않은 걸까. 문득 집 앞마당에 있던 야자수는 얼마나 더 컸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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