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중국 청년과의 이틀

영어가 되지 않는 중국인 여행자와, 중국어가 되지 않는 한국인 로컬

by 정욱

후배 L로부터 월요일 아침에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선배,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는 당연히 거짓말이다. 실제로 저렇게 메시지가 오진 않았다.


백수에게 월요일 아침은 일요일 아침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느지막이 오전 10시쯤 일어나 TV를 켜고 주식 방송을 배경음악 삼아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때 후배 L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 친구의 중요한 중국 거래처 사장 아들이 한국에 놀러 왔는데, 화·수 이틀간 동행하며 한국 문화를 소개해 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이틀간의 보수도 꽤 쏠쏠했다. 어차피 할 일 없이 플스나 붙잡고 있을 게 뻔했으니, 조금 귀찮긴 했으나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문득 단편소설의 도입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해나의 단편 소설 <스무드>는 느낌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을 담고 있으니. '내가 또 언제 타자의 시선으로 한국을 경험해 보겠나' 싶은 호기심도 생겼다.


그렇게 23살짜리 중국인 청년과 이틀 동안의 한국 여행이 시작되었다.


만남의 장소는 인천 서구의 한 사무실이었다. 본가 근처라 찾아가는 길은 익숙했다. 아침 일찍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사무실에 도착하니 젊은 청년 하나와, 나이 든 중년의 남성 둘 이렇게 셋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장면이 눈에 보였다. 중년 남성 중 한 명은 우리를 이틀 동안 데리고 다닐 운전기사였고, 한 명은 이 일을 의뢰한 사장인 모양이었다. 그는 중국인 청년을 잘 부탁한다며 몇 가지 배경을 설명해 주었다. 청년의 이름은 '팡 진하오(Fang Jinhao)'. 중국어 표기는 모르겠지만, 그게 그 청년의 이름이었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어색한 악수를 나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첫날부터 오후엔 비 예보가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한국의 대학을 구경해보고 싶다는 청년의 요청에 따라 오전에 연세대학교를 구경한 뒤 여의도 더현대 서울로 향하는 일정을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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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가득했다. 그는 영어를 거의 못 했고, 나는 중국어를 전혀 몰랐다. 한국어 외에 유일하게 익숙한 제2외국어가 영어뿐인데, 앞날이 캄캄했다. 그때 번역기 앱이 떠올랐다. 나는 구글 번역기를 켜고 더듬더듬 대화를 시도했다.


"한국에서 특별히 하고 싶은 거 있었어?"


그가 뭐라 뭐라 답했지만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답답함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얼른 내가 번역기 어플에서 음성 모드를 켜, 그의 앞에 갖다 대며 손짓을 했다. 아, 역시 바디랭귀지란. 그가 거기에 대고 뭐라고 중국어로 말하자, 스마트폰 화면에 그대로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타났다.


[딱히 없었어서 뭐든 괜찮아]


번역하나 마나 별 도움이 안 되는 문장이었다. 막막해진 나는 다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어색함을 한 아름 안고 신촌에 도착했다. 익숙한 백양로 지하로 들어서서 기념품점부터 구경했다. 청년은 연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더니, 이름 모를 중국 쇼핑몰 앱을 켜서 가격을 비교하곤 "비싸다"를 연발했다. 기념품이란 원래 가성비로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번역하기 번거로워 관두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건 그의 특징이었다. 아주 철저하고 검소한 소비 성향.


기념품 점을 뒤로한 채, 지상으로 나와 학교를 천천히 소개했다. 중앙도서관과 대강당, 학관, 언더우드상과 본관을 지나 연희관과 대우관까지 둘러본 뒤 과학관 앞길을 지나 공학원으로 향하는 길까지.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친구에게 공학원까지 소개해준 뒤, 학관에서 식사를 했다. 추억의 '공학원 순두부'는 사라졌고, 학생회관도 1층 식당만 열려 있었다. 식당의 맛은 좋게 말하면 변함이 없었고, 나쁘게 말하면 여전히 매력이 없었다. 식사하며 감상을 물으니 뜻밖에 정성스러운 후기가 돌아왔다. '학생들이 모두 영리해 보이고, 학교가 잘 정돈되어 있으며 역사가 깊어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다'라는 내용이 중국어로 길게 적혀 있었다. (학생들의 영리함이 어떻게 보였는지는 의문이지만) 꽤 만족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학교 투어를 마치고 스타벅스에서 기사님 커피까지 챙겨 여의도 더현대 서울로 향했다.


매장을 한 층씩 둘러보는데 그가 다시 번역기 화면을 내밀었다. '여긴 너무 비싸다, 고급 브랜드만 있다.'


'중국에서 부자라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기념품점에서의 모습이 떠올라 그냥 검소한 친구인가 보다 하고 지하 매장으로 내려갔다. 그는 나이키와 아디다스 같은 브랜드를 보고 싶어 했다. 아디다스에서 트랙탑을 한참 입어보는 그를 위해 점원에게 사이즈를 묻고, 얼룩을 체크해 교체를 요청하는 등 '퍼스널 쇼퍼' 노릇을 톡톡히 했다. 속으로는 '10만 원짜리 저지 하나 사는데 더럽게 까다롭네' 싶었지만, 문득 너무 쉽게 소비하는 내 태도를 반성하게 되기도 했다.


이어 그가 처음으로 적극적인 의사를 밝히며 가보자고 한 곳은 MLB매장이었다. 매장 안은 이미 쇼핑 중인 중국인들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아디다스에서도 이 친구와 비슷한 옷을 입어보던 중국인들을 봤는데, 국가마다 유행하는 아이템이 확실히 다르다는 게 실감 났다. 들른 김에 MLB에서 초록색 모자를 집어 들고 계산을 마친 나와는 달리 그는 한참 비교해 보더니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중국보다 비싸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이동 중에도 쉴 새 없이 쇼핑 앱으로 가격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내 코트 가격을 묻더니, 어머니로부터 코트를 사 오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했다. 예산을 묻자 갑자기 '200만 원에서 300만 원대'라는 숫자가 튀어나왔다. 10만 원짜리 저지에는 엄격하던 기준이 갑자기 널뛰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윤허'하신 아이템에는 상한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타임(TIME)과 시스템(SYSTEM) 같은 브랜드를 둘러봤다. 그는 거울을 보며 사진을 찍어 어머니께 전송했다. 어머니의 최종 승인이 떨어져야 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평소 네 스타일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

"맞아."

"어머니들은 보통 아들 옷 입는 게 맘에 안 드시는 법이지."


물론 나는 예외지만,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 뒤로도 더현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별 소득 없이 첫 번째 날을 마무리 지었다. 내일은 또 어떻게 시간을 때우나 막막하던 차에, 운전기사님께서 국중박 얘기를 꺼냈다. '아 거기가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 물어보니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은 아직 가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행히 그 친구도 아직 안 가본 곳이라기에 10시 약속을 잡고 그를 보냈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확인한 걸음 수는 14,000걸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조금 일찍 박물관에 도착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으니 기사님께 연락이 왔다. 10시 정각에 도착한 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근 케이팝데몬헌터스를 위시한 K-컬처 열풍으로 관람객이 폭증했다는 뉴스를 봤는데,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다행히 걱정한 만큼 붐비지는 않았다. 역사에 관심이 많다며,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물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그의 옆에서, 오랜만에 나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을 천천히 둘러봤다. 중간중간 모르는 게 있으면 질문하라고 했지만, 막상 답변을 잘할 자신은 없었다.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한 뒤 함께 받은 투구가 기증된 전시관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그가 질문을 던졌다.


"저 사람이 전두환 대통령이야?" 손기정 선수 옆에 놓인 한 남성을 가리키며 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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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봤나? 싶어 스마트폰 화면과 내 눈앞에 놓인 사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당연히 전두환 대통령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전날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연 '평산책방'을 가보고 싶었는데 멀어서 못 갔다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나, 차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보니 윤석열 대통령과 관련된 숏츠(아마 중국은 유튜브가 안 되니 숏츠는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숏폼)를 보고 있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도대체... 이 친구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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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국립중앙박물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사유의 방'을 지나, 중국·일본관까지 훑어본 뒤 국중박을 나와 용산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박물관 관람 중 미리 예약해 둔 샤부샤부 식당이었다.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셰프가 하는 식당이라는데, 한 컷도 나오진 않은 분인 것 같았다. 외국인 접대용으로는 제격이었다. 이번에도 그에게 중앙박물관 후기를 물어봤는데, 연세대 때처럼 꽤 정성스런 후기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 후기가 인상적이어서 사진을 남겨두었는데, 결론적으로는 꽤 만족스럽게 관람한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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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채운 뒤, 그는 여자 지인(본인 주장은 여사친)의 심부름을 위해 '팝마트'에 가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용산 아이파크몰에 매장이 있었다. 그는 영상통화로 지인에게 물건을 확인해 주더니, 이내 예의 그 중국 사이트를 확인하고는 다시 "중국이 더 싸다"며 빈손으로 돌아섰다. 응...그래, 너답다... 싶어 그냥 웃음이 났다.


마지막 행선지는 성수동이었다. 최근의 성수동이라고 하면 흔히 '연무장길'을 얘기하기 때문에, 그곳을 길게 쭉 둘러보는 걸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중간에 무신사 스토어를 데려가 쇼핑도 잠깐 했는데, 거기서도 몇 가지 입어보더니 또 '중국에서 똑같은 게 더 싸다'는 얘기를 했다. 이젠 나도 지쳐서 "그래, 그렇겠지"라며 해탈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렇게, 중국인과의 이틀을 마무리 짓고 약속된 돈을 받으며 기묘했던 아르바이트를 마무리 지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클리셰를 빌리지 않더라도, 생김새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문화와 사고방식 속에 살고 있음을 절실히 느낀 시간이었다. 이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준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 친구가 소위 '소황제' 세대의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건 하나를 사도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고, 열흘간의 여행 동안 누군가가 없으면 혼자 이동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의존적인 20대.


성해나의 단편 소설 <스무드>를 떠올리고 갔으나, 끝에 남은 건 구글 번역기와 AI로 사진을 분석해 주던 중국 쇼핑몰 어플 등의 현대 테크놀로지 기술에 대한 무한한 감사들만 남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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