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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Feb 11. 2021

미시령 옛길, 걸어서 넘어본 적 있나요?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명절을 맞아 날이 풀리고 찬 바람 사이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지는 하루. 내가 개척한 여행 코스를 떠올리는 것으로 역마살을 달래 보자. 일단, 배낭을 꾸려볼까? 갈아입을 속옷과 가벼운 평상복을 잘 개켜 넣는다. 수건과 물티슈, 휴지를 넉넉히 챙기고 휴대용 보냉팩에 시원하게 냉각된 맥주와  아이스팩을 넣어 배낭 깊은 곳에 넣는다. 보조 배터리를 충전해 챙기고 블루투스 스피커 역시 빵빵하게 충전해 가방에 매달아 놓는다. 아, 배낭 안에 도시락 정도를 넣을 공간은 남겨둬야 한다. 그런데 어딜 가는데 도시락까지 필요한 거지? 그곳은 미시령 옛길이다.

미시령 정상에서 내려본 속초의 풍경

미시령 옛길은 미시령이 출발하는 인제 용대리 황태마을에서 출발해 미시령 고개를 넘어 속초의 델피노 리조트 뒷길에서 끝나는 도로다. 예전에 속초는 여기나 한계령길, 진부령 길 아니면 갈 수가 없었지만 요즘에는 미시령 터널로 휭~ 가면 끝이니 길의 쓰임새가 확 줄어 가끔 경치를 보러 지나는 사람들이나 자전거 투어를 하는 사람만 지날 정도로 인적이 드물다. 내가 개척한 것은 ‘도보’ 투어이다.


먼저, 동서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용대삼거리로 향한다. 예전엔 용대리 가는 버스가 6시 반, 7시 반, 8시 반쯤으로 3대가 있었지만 요즘은 코로나로 수요가 줄어 7시 반 경 하루 한 대만 운행하고 있다. 1시간 반쯤 달리면 원통 휴게소에 잠시 정차하는데 이때 반드시 김밥이나 도시락, 샌드위치 등과 간식거리, 물을 사두도록 하자. 그 용도는 잠시 후 공개.

선바위 휴게소에서 꼭 용무를 해결하자. 이 다음부터 화장실은 정상에 기념관 하나뿐이다

원통 휴게소에서 10분 쉰 후 30분만 더 가면 용대 사거리에 도착한다. 이제 미시령 옛길 자전거 안내 팻말을 잘 보면서 미시령 입구를 향해 걸어가자. 여행을 처음 기획했던 2015년쯤에는 자동차 전용 도로의 차도 갓길을 15분 정도 지나야 해 위험했지만 지금은 자전거 전용 도로/트래킹 도로가 완공되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용대리 입구서 한 40분쯤 걸어 나가면 선바위 휴게소라는 사설 휴게소가 나오는데, 배가 아프지 않더라도 반드시 이곳에서 큰 일을 한 번 정도 치르도록 하자. 그 이유도 잠시 후 공개.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본격적으로 미시령 산행이 시작되는 입구가 나온다.

차도지만 차가 거의 없으니 자신있게 쭉쭉 걸어 올라간다

이제부터는 그냥 외길. 지도도 필요 없다. 그냥 무념무상으로 쭉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간다. 각도 20도 이상의 급경사가 계속되며 평지나 내리막길은 나오지 않으니 자신의 체력을 감안해 잘 쉬어가며 올라가도록 하자. 나도 몸이 둔하고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이 오르막길을 거의 6~7번을 끊어가며 올라가는데, 중간중간 차량 이탈 방지석에 몸을 기대고 앉아 물 한 모금 하며 바라보는 풍경은 정말 좋다. 

미시령 기념관/복원사업 이전 풍경. 지금은 미시령 역사 기념관이 완공되었다. 걸어올라가다 미시령비가 보이면 힘이 팍팍 나지. 암.

여기서 미리 화장실도 다녀오고, 물과 도시락까지 다 준비해 가야 하는 이유 공개. 미시령 옛길은  매점은 커녕 물먹는 곳도 전혀 없는, 사실상 차로 지나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상에 원래 미시령 휴게소가 있기는 했지만 워낙 통행이 적은 데다 잘못 개발해 미시령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끼치다 보니 지금은 모두 없애고 원래 환경으로 되돌리는 동시에 미시령의 역사를 담은 소개소를 정상에 만들어 놓았다. 화장실도 길 전체에 이곳 하나뿐이라 앞서 선바위 휴게소에서 큰일을 미리 해결하고 도시락을 준비해야만 한다. 내 페이스로는 매번 정상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것 같다. 기분이 좋다고 아까 사놓은 도시락을 까지는 말자. 정 못 참겠으면 간식 조금?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보통 샐러드나 김밥 같은걸 싸가지만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싸가서 이렇게 뽀글이를 해먹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까지는 할 필요 없다. 정상을 지나면 이제부터는 무조건 내리막길이다. 멀리 보이는 속초 영랑호와 바다를 바라보며, 주위에 사람도 없으니 준비해 간 블루투스 스피커를 빵빵 울리며 천천히 내려가는 눈 맛이 정말 시원하다. 이렇게 한 시간 정도 걸어 내려가면 작은 다리 앞에 정자와 쉼터가 하나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점심 포인트. 이때쯤 우리가 잊고 있던 존재가 활약할 때다. 바로 출발 전부터 보냉팩에 챙겨 넣은 시원한 맥주! 이제부터 힘든 길은 없으니 도시락과 함께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라는 꿀 시간을 즐겨 보도록 하자.

미시령 도보 여행의 끝점

이제 남은 길은 끊임없이 산자락을 타고 내려가는 것뿐이다. 사람 따라 페이스는 다르지만, 정상에서 점심과 군데군데 휴식 시간 포함, 3~4시간 정도면 여행의 끝점인 델피노 리조트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면 속초 시내로 들어갈 수 있는데, 보통 이렇게 산을 넘으면 15:10분 차나 16:50분 차를 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차 시간에 맞춰 델피노 리조트 라운지에서 세수도 좀 하고, 매점도 있으니 배도 채우며 느긋히 버스를 기다리자.


효율로만 따지면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여행이다. 정 산의 경치를 보고 싶다면 차를 몰거나 한계령행 버스를 타고 휴게소를 들러도 될 일. 굳이 꾸역꾸역 화장실도 제대로 없는 아스팔트 길을 종일 걷는 일이 그다지 일반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한 번 걸어보면 힘은 들지만 그렇게 시간이 아깝거나 쓸데없지 않을 것이다.

능선을 따라 걷는 중 내내 보는 풍경

굽이굽이 능선을 따라 보이는 풍경과 시원한 바람, 깨끗한 공기는 결코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는 느낄 수 없는 미시령 도보 여행 코스만의 것이다. 모든 코스를 완주하고 숙소에서 샤워한 다음 침대에 누우면, 기분 좋은 종아리 통증과 함께 뭔가 뿌듯한 기운이 올라온다. 이때 BGM은 당연히 ‘장기하와 얼굴들’의 <느리게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죽을 만큼 뛰다가는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미시령 옛길은 ‘빨리빨리 달리다 놓치는 것’에 관해 생각하게 해 준다. 미치도록 빨라진 대중교통 때문에 우리는 새마을호로 부산 갈 때 대전 분기점에서 먹었던 가락국수를 잃었고 청량리에서 정동진 가는 밤 열차에서 취하도록 마시던 홍익회 맥주를 잃었다. 버스와 승용차로 씽씽 지나다닌 덕에 길거리에서 먹는 어묵꼬치와 붕어빵도 이제는 맛보기 힘들어졌다.


‘이제는 좀 바쁘게 바쁘게 빨리 달리는 게 어떻겠냐’며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할 수 없다. 아직까지 난 버틸 수 있는 한 느리게 걸어보려 한다. 이제 한두 달만 지나면 곧 길이 열리겠지? 그러면  또다시 나는 짐을 싸서 미시령 중턱을 걷고 있을 거다. 혹시 미시령 옛길을 차로 넘다 어떤 남자가 블루투스 스피커로 헤비메탈 빵빵 틀어놓고 걷고 있으면 그게 난 줄 아시라.



p.s) 미시령 옛길은 강원도에 눈이 내리고 길이 얼거나 비가 와서 절벽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면 안전 문제로 도로를 폐쇄한다. 그래서 장마철이나 비 오는 날, 겨울에는 늘 막혀있어 차는커녕 도보로도 갈 수 없다. 보통 3월 말부터 6월 중순, 9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는 상시로 열려있으니 혹시 내 추천 미시령 코스를 따라 해 볼 사람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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