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행] 박주영(2021). 법정의 얼굴들. 모로
내게 판사란 직업과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별세계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지독한 편견이지만 이 편견을 아주 오래가지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정치권에서 활약하는 법조 출신 인사들 때문이다. 여기서 굳이 정치와 정치인을 논할 여력과 마음이 없지만 적어도 일부에 한정하더라도 판사란 그저 또다른 기득권의 일부이고 판사라는 자리를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활용하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그런 편견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여기서 그들의 그런 모습들을 비판할 권리가 내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데 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던가.
요즘은 문이 넓어져 로스쿨을 졸업해서 변호사 시험을 합격하면 변호사가 되지만, 기억하건대 옛날에 사시 합격자는 정말 개천의 용이었다. 그것도 일부 대학 합격자들이 누리는, 그들은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런 높은 자리(고등법원장 - 차관 대우)가 보통 사람들이 쉽게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살면서 법을 위반하지 않으면 전혀 만나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법조계 사람들이다. 사회의 규범을 위반하지 않고 살면 말이다.
이에 비하면 의사는 누구든 언젠가 만날 수밖에 없는 전문인들이다. 앞에 언급한 법조인들도 결국 의사를 만나고 의사의 신세를 지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직업의 안정성으로는 모르겠지만 사회에 필요한 이란 전제를 달면 전문직 종사자들에 대한 판단도 달라질 듯한데, 굳이 다른 직업을 판단하면서 살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사설이 길어진 이유는 이런 책을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법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정당히 피해 가면서 살아왔을 테지만, 책을 읽으며 울컥 울컥하기가 쉽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 생각되는 게 박주영 판사는 누굴까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찾아봤다. 한때 인싸는 아니었을 것이란 예측이 틀리지는 않았는데 맞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우선, 변호사. 성적이 좋아서 김앤장 등 로펌에 갔다가 판사가 되었다면 인싸일텐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에 학교도 인싸 학교도 아니다. 소위 말하는 스카이 말이다. 꼭 그래서인 것은 아니겠지만 애초에 변호사란 옷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판사라는 직업만 보면 그들은 결코 아웃사이더도 아닐 것이다.
같은 법원 내에서는 아웃사이더일는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판사라는 직업이 아웃사이더일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올바른지를 떠나서 박주영 판사는 적어도 책 내용으로만 보면 상당한 독서량과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은 재즈와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이는 결코 글에서 드러나지 않고 드러나기도 어렵다. 결론적으로 그는 아주 내공이 강한 판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저 드는 생각이 인싸가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감정이입이 쉽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정도의 추측뿐.
"나는 판단자임과 동시에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다.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내가 본 세상의 일부가 사라진다. 고통과 슬픔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기억뿐이다. 고통은 우리가 건널 디딤돌이다. 잊는 순간 고통은 사라지겠지만 딛고 건널 디딤돌도 사라진다. 아니, 아예 건널 생각조차 잊어버린다. 기록만이 고통과 절망의 시공을 건너가는,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길이다. 이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p. 8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생의 기로에 선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은, 그저 그에게 눈길을 주고 귀 기울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런 믿음을 그에게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한 개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p. 32~33
"결국 어른이 된다는 건 많은 사건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감정의 층위가 두터워져간다는 것이다. 어른은 다층적이고 복잡한 존재다. 어른은 수많은 세월 겹겹이 쌓여온 퇴적인간이다. 그러나 퇴적층의 마지막 모습만으로 굳어버린 이는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은 포토샵의 레이어와 비슷하다. 투명 종이 여러 장에 그린 그림을 하나로 겹쳐놓은 상태다. 아래 깔린 그림이 완전히 가려지지 않는다. 밑그림처럼 속감정도 배어나돈다. 모든 감정이 겹쳐저 비로소 하나의 표정이 된다. 웃듯 울고, 울듯 웃는다. 기쁘면서 슬프고, 슬프면서 기쁘다. 우리 모두 그렇게 어른이 된다." p. 241
그런데, 이 판사가 인싸인지 아닌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음을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한다. 박주영 작가의 공감 능력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나서야 판사라는 직업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물론 쉽게 쉽게 판결하는 판사들도 적지 않겠지만, 혹은 그리 권장하고 싶은 직업은 아닐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누군가를 판단한다? 이게 쉬운 일일까?
이 글에 나오는 대부분의 얘기들이 어둡다. 사회에서 그리 떠들어대던 사건들도 있고, 대부분 우리가 모르거나 알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서 이 글을 읽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커다란 울림이 지속된다. 자살, 아동학대 등 그저 뉴스에서만 들었던 사건들을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불편해짐을, 그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읽기 힘든 책이다. 그런 일들을 판단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이 기록을 남긴 것이다. '판단자이면서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
이럴 때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무리 자주 써도 가치가 줄지 않는 단어 '존경'이다. 사실, 법원에 피고인, 피고인 가족 혹은 피해자, 피해자 가족 으로 간다는 그 자체가 그리 즐겁고 반가울 리가 없다. 대부분 친구나 가족이 아니라면, 관계조차도 부정하고 싶은, 그런데 엄연히 우리와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한테 조금이나마 시선을 돌리게 만든 '힘'을 생각하면, 적어도 이 책은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부정적인 안개를 걷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이래서 책이 강하다. 좋은 책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