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인천공항에 갔다. 오랜만에 베트남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여행하면 당연히 유럽 여행이어야 하거늘 굳이 동남아시아에 갈 필요가 있을까 했었다. 누군가 돈 쓸 맛 느끼고 싶으면 태국이나,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를 가보라고 했다. 그중 태국은 물가가 거의 우리 수준을 따라왔다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유럽 정도는 그래도 갈 수 있었는데 아내와 상의해서 비용이 덜 드는 곳으로 정했다. 어찌해서 베트남을 선택하고 출국하던 날 출국장 앞에서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동문들끼리 끼리끼리 모인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었다. 어느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기에 지난 40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긴가민가했다. 40년 동안 강산이 4번이나 바뀌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태웅이 얼굴을 보니 시간이 가긴 갔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야, 변태 아냐?”
내 입에서 조금도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옆에 있던 아내 얼굴빛이 순간 달라졌다. 당황했다는 표시다. 목소리가 컸나? 컸다. 이름 때문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친구 옆에 있던 마누라와 딸과 사위로 보이는 이들 얼굴에 잠시 웃음이 번지는가 싶더니 눈이 마주치자 순간 표정을 바꾼다. 그런 즉시 5명의 10개 시선이 친구한테 모아졌다.
“오랜만이다.”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이 아니라 아예 똥 씹은 표정이었다. 확신할 수 없는 건 똥을 씹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는 그것만 확실했다. 어디 가냐고 물어봤더니 환갑을 맞아 딸 식구와 부부 동반으로 베트남에 간다고 했다. 베트남? 이런 우연이 있나 했다. 40년 만에 만난 같은 반 고등학교동창둘이 가족끼리 베트남을 여행을 가는데 같은 비행기를 타다니.
“와 이런 우연이. 이럴 수 있나?” 그랬더니 그 친구 입에서 뛰어나온 말.
“퍼스트 클래스 타니?”
아내가 갑자기 내 눈치를 살핀다. 자기 남편 기분이 틀림없이 나빴을 텐데 어떻게 반응할지 불안한 표정이다. 이럴 때 내편이 되는 게 아내구나 싶었다.
“아니!”
“이코노미!”
목소리가 역시나 컸다. 어떻게 아냐고?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봤기 때문이다. 당당한 목소리였다고 생각하지만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심정이다. 다시 5명의 10개 시선이 나한테 집중되었다. 속으로 심사가 뒤틀려 욕이 튀어나오려던 순간 입에서 다른 말이 나왔다.
“역시나 변태. 성공했구나!”
그렇게 더럽던 마음을 추스르던 짧은 순간 내 기억은 어느덧 고등학교 3학년 때로 이동을 해버렸다. 다들 대학입시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날은 체육시간이었다. 평상시 수업시간에도 학생들이 잠을 자든 말든 크게 간섭을 하지 않던 담임선생이 그날 체육시간만큼은 모두 빠짐없이 참가하도록 독려를 했다. 그건 담임이 체육선생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반에서 반 정도 학생들은 입시를 표기한 상태였다. 그저 무사히 졸업하기만을 바라던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웅이는 독야청청하던 친구였다. 전체 15반 학급 중에 마지막 15반에 태웅이가 있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다. 당연히 그는 5반에 있어야 했다. 1반부터 4반까지는 문과지망생 반이니까 이과에서 항상 1등을 차지한 그는 3학년 이과 첫 반에 있어야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61명의 반은 입학 포기자들이고, 나머지 반의반은 그저 2년제 대학 정도나 입학하기를 학교는 기대를 했었다. 그나마 나머지 반이 수도권이나 지방대 갈 정도인데 전체 이과에서 항상 수석을 하던 태웅이가 우리 반에 있다니. 뭔가 이상했었다. 그것도 학급 반장으로. 합리적으로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땐 그러려니 했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을 학교에서 말썽꾸러기들을 모아놓은 반에 배정한 것도 이상한데, 강남 사학 명문 H고등학교 입장에선 치욕이었을 꼴등반에서 이과 전교 1등을 학급 반장까지 시키다니. 그때는 그 상황을 이해할 머리가 부족했다. 지금은 머리카락이 M자형으로 빠져 여전히 머리카락도 부족하지만 말이다.
강남에 아주 잘 나가는 부모들이 포진한 H고등학교는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률이 새로운 이사장이 온 후 10년째 전국 탑이었다. 그래서인지 모 공영방송에 이사장의 교육철학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갔던 것으로 기억을 했었다. 꼴찌도 말썽꾸러기도 차별하지 않는 전인교육의 학교라는 평판. 후자 때문은 아니겠지만 졸업 후 학생들뿐만 아니라 부모들 사이에서 네트워킹이 대단했기에 이 학교에 전학시키려는 열풍으로 주변 전세 시세가 전국에서도 상위권이라는 부동산발 카더라 소문이 진동했었다. 주로 공부를 하지 못했던 학생들 사이에 선생들이 반에서 싹수가 파란 애들을 따로 뽑아 고액비밀과외를 시킨다는 말들이 돌기도 했는데, 의례 그렇듯이 그저 패배자들의 하소연으로 치부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태웅이도 같은 방송에 나와 어쩌고 저쩌고 했던 것도 같다. 이래저래 태웅이는 고등학교 시절 항상 화재를 몰고 다닌 엄친아 중 최고의 엄친아였는데, 거기에 반전이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 20여 년 만에 만난 동창 창열이가 알려주었다. 그와 내가 친했고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면 굳이 떠올릴 일들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우연히 만나 특별히 할 일이 없던 우리가 별 다방에 앉아 그냥 지나가는 말로 이말 저말 했던 말 중 유독 기억이 났던 말들 중 하나였다. 대충 요약하자면 태웅이가 이사장 홍보를 위해서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니라, 태웅이 아버지와 이사장 사이에 적어도 묵계를 넘어 간계가 있었다는 믿어야 할까 말까 한 얘기.
이 말을 그때 쉽게 넘기지 않은 건 창열이 또한 우리 반의 명물 중의 한 명인데, 교내 최고 우등생 태웅이와 친했다는 것이 별나 보이긴 했었다. 그들이 서로 사촌간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왕따와 미친놈이라서 서로 친한가 하는 정도. 내 생각에 창열이가 그런 얘기를 나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반 짝꿍이라는 것을 넘어 성적이 고만고만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창열이가 그런 얘기를 하기 전에도 당시 누군가 태웅이 엄마와 창열이 엄마가 친자매였고 그 둘이 사촌 간이며, 창열이 아버지도 잘 나가는 S전자 전무라는 얘기가 뇌 속 어딘가 저장되어 있었다. 생각난 김에 마저 창열이 말을 보태면 태웅이 아버지는 무슨 검사장인가 뭐라고 했는데, 자기 아들에 대한 부당대우를 항의하기 위해 이사장을 찾아왔다고 했었다. 방문한 태웅이 아버지가 이사장을 만난 후 바로 꼬리를 내린 것은 이사장 큰 형이 정권의 실세 중의 실세 무슨 총장이었다나 뭐라나. 이사장이 다음 인사 때 태웅이 아버지를 위해 노력해 주기로 했다는 내용이라고 기억이 났다. 그땐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로 치부했다. 태웅이나 창열이나 그들 집안은 나와는 다른 리그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흘려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H고등학교에 다닌 것이 그들에게 이상한 거지만 한 번도 누구에게 내 사정을 얘기하지 않았었다. 당시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동업자였던 아버지 친구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살게 해 준 곳이 학교 근처 집이었으니 학군 때문에 전학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이뤄진 것이다. 아버지 대신해서 아버지 친구가 내게 베푼 마지막 배려와 강남에 살고 싶었던 어머니의 바람이라고나 할까. 아버지 유고에 맞춰 명문대에 진학을 못한 것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자기야 가자!”
정신이 아니 생각이 돌아왔다. 약간 상기된 목소리와 말투. 아내도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4명의 적대적인 8개 시선을 뚫고 비틀린 마음을 감추고 고객을 바짝 쳐들고 한마디 했다. 말없이 헤어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나의 졸렬함을 끝까지 보여주었다.
“그때 너 팬티 빨간색이었지?”
“여행 잘해라.”
속사포처럼 퍼붓고, 이건 내 남은 자존심 때문이지만, 그렇게 우린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호찌민 국제공항에 내렸다고 생각했다. 같은 비행기에 그 친구가 타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으니까. 또 퍼스트 클래스에 탄 그 친구가 나를 기다려줄 하등의 이유도 없었기에 말이다. 아내와 오랜만에 떠난 해외여행인데, 그날따라 만석으로 이코노미석이 꽉 차서 늦게 비행기를 빠져나갔지만 이상하게 도착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40년 만에 만난 동창 태웅이가 졸업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묻지 않고 ‘퍼스트 클래스’라는 말만으로도 순간 욱하고 올라온 감정을 감추느라 옹졸한 내 마음이 조금 힘들긴 했다. 난 졸업 후 응시한 대학에 낙방을 하고 다음 해 지방대학에 입학한 후 평범한 학생들이 그렇듯이 지방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었다. 남은 자존심 때문에 두문불출하고 회사만 오가던 생활을 하던 중 외로움에 지쳐 선을 보기 시작해서 늦은 나이에 2년제 대학을 나온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내가 아이를 갖지 못해 자기 자식을 금쪽이처럼 모실 기회가 없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위안하기도 했다. 물려줄 재산도 없으니 자식이 없는 것이 상팔자라고 생각했었다. 회사도 지방이라 고등학교 동창들 성공한 이런저런 근황들을 멀리 할 수 있었고, 인생이란 굴곡 속에 주변인으로 살아왔기에 친구라는 단어가 주는 알량함을 일찍 알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친구는 그냥 친구라는. 친구가 내 인생을 대신할 수 없다는. 남한테 해줄 것도 바랄 것도 없는. 친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끼리끼리 어울려 남과 비교하고 헤픈 우정팔이하는 모임은 진작 발을 들여놓지 않은 덕에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지 못한 건 다행이었다. 자식이 없으니 돈을 쓸 곳도 적어 아내와 둘이 알뜰살뜰 모아 아파트를 마련하고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 말년에 회사에서 챙겨줘 만년부장이란 별명을 깨고 이사까지 달고 퇴직을 한 후라 나도 나름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며 살던 참에 동창 태웅이를 만난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이 가상해서 마저 그날의 사건을 얘기하자면. 평소 체육을 등한시하던 이사장이 잠시 해외로 외유를 떠난 차에, 설에 의하면 젊은 처자 끼고 떠났다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체육선생이라고 움츠린 어깨로 다니던 담임 박명욱이 학생들에게 체육시간이니 당연히 체육활동을 하겠다고 그날따라 운동장에 집합을 시킨 것이다. 그러니 다들 당황하며 우왕장황 사물함 깊숙이 넣어둔 체육복을 갈아입으려 했는데 유독 태웅이만 허리띠를 풀은 체 체육복 하의를 갈아입지 않고 머뭇머뭇거리던 거였다. 전 학년의 모범생이며 이사장의 보호아래 성역에 머물던 태웅이가 왜 그러지 하던 차에 그와 유일하게 친하던 창열이의 장난이 빛을 발한 것이다. 장난이란 것이 유치하게 초등학생들이 할 법한 태웅이 바지를 순식간에 내린 것.
‘빨간 팬티.’ 그랬다. 태웅이가 그날 더욱 유명해진 이유였다. 가뜩이나 태웅이 성이 변이였지만 학교 최고 우등생에 학교선생들과 이사장을 호위무사로 둔 태웅이를 변태라고 놀릴 수 없던 차에 아이들이 그일 후 거리낌 없이 변태라고 부르기 시작했었다. 변태웅이가 아닌 그냥 변태. 여기에 한마디 보태자면 빨간 팬티는 난세에 태웅이 부모가 항상 찾아가는 시대의 거사 고봉선사가 태웅이 앞날을 위해 처방한 비책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액을 물리치고 대입고사 전체 수석을 할 수 있다는 빨간 팬티. 그래서 변태가 그해 날았다고 한다. 빨간 팬티 입고 서쪽 하늘을 날아가는 변태를 누가 봤다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