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고 했다. 결국, 내렸다. 산악지역이라서 그런지 매번 날씨가 바뀌었다. 먼 나라에서 남의 나라 왔으니 당연히 화창한 날씨를 바라지 않던가. 그렇게 일기예보를 확인한 후 일행에게 날씨가 좋다는군요. 그렇게 말하고 난 후 바로 아니 비 온다는데? 이렇게 대화가 바뀌었다. 오후에 시작할 일정은 친퀘 토리(Cinque Torri) 산장에서 크로다 다 라고(Croda da Lago) 산장까지 걷는 것이다. 그전에 그럼 오전 일정은?
어제만 해도 이런 날씨 였다. 자전거 라이더!
안타까우면서도 짜증이 나는 일은 비단 날씨만이 아니었다. 일부 일정이 바뀌면서 숙박지가 바뀌었다. 이건 전적으로 모임을 주선한 회사가 책임져야 하지만, 성수기라서 산장 예약이 되지 않았다고 했었다. 이러면 끝인가? 모르쇠! 알타 비아 1 와서 산장 예약이 되지 않으면 어쩌라고? 구간과 구간을 구별하는 건, 오늘 우리가 얼마를 걸어야 하는 건, 산장과 산장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오늘 어느 산장에서 시작해서 어느 산장에 도착해서 잠을 잔다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 있을까?
친퀘 토리 산장에서 보이는 풍경. 토리 큰형님을 오르는 암벽 등반가들.
그래서였다. 일부 일정이 무리하게 진행되었다. 멈춰야 할 곳보다 더 걸어야 했는데, 숙소가 산장이 아니라 인근 호텔로 바뀌는 바람에 원래 계획을 지킬 수 없었다. 물론, 계획은 계획이지만. 산행 중 차를 탈 수 없으니, 어떻게든 차를 탈 수 있는 곳으로 걸어야 했으니, 돌로미티는 사실 이것이 가능하다. 대부분 산장 근처에 차가 올라올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산장에서 잘 수 없으니 다시 차를 타고 내려가야 했다. 지난 일 자꾸 소처럼 되새김질해 봤자, 이미 시간은 휙 하고 날아갔다. 암튼, 시점을 그날 그때로 돌아가서, 그날 오전엔 그럼 뭘 했을까?
무슨 생각을?
어제 일정을 끝냈던 라가주이 산장 전망대 승차장 앞에서 시작했다. 그곳에서 산 쪽으로 걸은 후 어제 잠을 잔 친퀘 토리 산장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오전 날씨도 썩 좋지 않았지만, 산장에서 빈둥거리면 뭐 할까? 걷는 것이 좋아서 이곳에 왔으니 쉴 사람은 쉬고, 더 걸을 사람은 더 걷고. 결과적으로 좋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머문 곳이 바로 친퀘 토리였기 때문이다. 다섯 개 바윗덩어리. 그 유명한. 아마, 돌로미티 하면 아! 거기 하는 곳 중에 하나. 아마도 트레 치메(Tre Cime)가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누군가에겐 친퀘 토리가 먼저 일 수도 있다. 이곳은 리프트 타고 쓩하고 오를 수 있으니. 왕복요금이 24 유로였었나? 접근이 용이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친퀘 토리 산장에서 본 석양
그렇게 시작한 오전 트레킹의 백미는 역시나 멀리서 친퀘 토리를 보면서 걷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멋진 놈! 이건 수컷일 수밖에 없다. 다시 봐도 다시 세봐도 5개 봉우리. 그곳에 사람들이 매달려 살려달라고(?) 했었는데. 거리가 멀어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는 않았고. 암벽 등반이란 것이 바위가 멋지니까, 매달린 사람들도 왠지 폼 나 보였다. 암벽이나 탈까??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다음 행선지 크로다 다 라고 산장을 향해 떠났다. 비 맞으면서.
비 오는 날 풍경. 친퀘 토리 중 토리 큰 형님!
알타 비아를 걷다 보면 가는 길이 정해져 있어 볼 사람은 다 보게 되어있다. 알타 비아 1 출발지 브라이에스 호수부터 비슷한 보폭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미국 친구 3명과 친퀘 토리 산장부터 내려가는 내내 우리 앞에서 정말 일정한 보폭과 시간으로 누가 독일 사람들 아니랄까 봐 걸었던. 독일 여성 10여 명이 아주 천천히 가이드를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들은 나중에 스타우란자 산장에서 만났는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오늘 최종 목적지는 같았다. 크로다 다 라고 산장. 저녁에 만났을 때야 여성 몇몇이 씩 하고 웃음을 보였다.
미국인 친구들이 먼저 내려가는 모습. 저 차량 근처에서 방향을 틀어 가다보면 나오는 계곡.
비 맞으며 걷는 산행길이 즐거울 리가. 게다가 길이 일부 구간에서는 진창길로 변했다. 친퀘 토리에서 반갑게 해후한 미국 친구 3명이 먼저 앞서나갔다. 확실히 젊었다. 그 후 후다닥 걸어내려 가, 독일 트레커들이 워낙 조심스럽게 걸어서, 저 밑 도로와 만나는 곳에서 일행을 기다린 후, 다 같이 방향을 우측으로 틀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미국 친구들과 독일 여성들이 앞서 나간 후였다. 급할 것도 없고, 빨리 걷는다고 비를 적게 맞는 것도 아니고. 산장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오르막이라서, 투덜대고 투덜대고 걷고 또 오르다 보니 뭔가 나오긴 나왔다. 호수!
크로다 다 라고 산장 주변과 호수
라고 페데라(Lago Federa).라고=호수, 페데라=베개 커버. 그러니 대충 베개 모양 호수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비는 약 올리려는지 더 세차 졌다. 뒤로 갈 수는 없으니 앞으로 갈 수밖에. 그 호수 끝에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다 움츠렸던 순간이 지나갈까 했지만, 산장 내부가 열악해 서로 자리다툼이 벌어지기도 하고. 대충 승자와 패자가 결정된 후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 뭔가 직감이 왔다. 비가 그친 것 같다는. 더불어 바람까지 멈춘 것 같은.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물에 비친 세상?
딱 절반이다.
그렇게 둘러본 호수. 어땠을까? 사위는 촉촉이 물에 젖어 녹색을 띠지는 않았다. 거무스럽게 보이기도 했고. 이건 저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 호수 위에 우뚝 선 반영. 한참을 바라본 후 돌아와 잠을 청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