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2009).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샘터
고등학교 3학년 학생 두 명이 학교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명수와 병호. 응급실에 실려간 그들. 그중 한 명인 병호는 상태가 위중해서 수술실로 들어간 후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나와서 전한 말. 병호는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날 응급실에 있던 작가는 온 마음을 다해 "정말 하느님이 계시다면 병호를 꼭 살려 주세요. 제가 수능시험을 아주 못 봐서 대학에 떨어져도 좋으니 내 친구 병호를 살려주세요, "라고 기도를 했으니 작가의 마음은 정말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같은 응급실에 있던 명수가 깨어나서 큰 소리로 했다는 말이 글의 제목이다. 누군가는 죽는데, 같이 사고가 난 누군가는 오줌이 마렵다고 한다. 전체 맥락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이렇게 생과 사가 겹치게 되면 사는 것 자체가 희극인 것처럼 들리는데,
그날 이후 작가는 행복이란 것이 특별하지 않은 거라서, 배고플 때 밥 먹고, 화장실 갈 때 화장실 가는 것 등등도 행복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책 제목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으로 정하기까지 작가가 책 제목을 정하는 에피소드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기적이니, 앞으로 살아갈 날들도 기적이라는. 이렇게 사는 것 자체를 감사와 은혜로 생각한다면 많은 갈등과 스트레스를 벗어나 살 수 있으련만 이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마음을 울리는 에세이로, 사는 무게로 심사가 뒤틀릴 때 읽으면 좋은 장영희 교수의 글을 다시 찾은 건 모임에서 이 책을 읽자고 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 만큼 산 것 같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자고 한 배경을 생각해 보건대, 하루하루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주어진 자기 여건을 받아들여 행복하게 살자는 취지 때문으로 이해하면서 읽은 책이었다. 마음 한편엔 이런 고리타분(?) 한 책을 읽는다는 반항심이 없지 않았지만, 언젠간가 작가가 쓴 책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세상에 없는 작가를 기리며 읽었다.
소아마비와 암 투병이라는 넘기 힘든 허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걸 글로 남겨 남겨진 사람들로 하여금 한줄기 빛을 경험하게 만든 그의 책이 빛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 자체가, 작가가 살아오면서 남긴 많은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 여전히 힘이 된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찜찜하지만,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외치는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작가가 말한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서 그것이 진정 기적"이라는 지적이 쉽게 와닿지 않은 건 내가 그처럼 장애인으로 살아왔던 것도 아니고, 몇 번에 걸쳐 생사를 넘나드는 암이란 고통을 겪어보지 못해서 그런 것임에 분명하지만, 여기에 내가 어느 날 그가 되어 똑같은 조건 속에 살아간다고 해서 그녀처럼 아름다운 글들을 남기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일상에서 '작은 것이 아름다운'진리를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그렇지 않던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나고 싶은 것처럼, 내가 가장 아프고 슬프고 어렵고 힘들고 지치고,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가 이 책을 내고 세상을 떠난 후 지금까지 우리가 부딪쳐온 그놈의 빌어먹을 삶이란 것이 그가 살아온 그때보다 더 힘들어진 것은 아닌지, 아니면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잠시 우울했지만, 글이 주는 힘 때문에 힘들게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따듯한 위로를 건네는 그의 말이 힘이 된 하루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오늘이 내일이 되고 내일이 모레가 되어, 슬쩍 웃는 내 모습 또한 볼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은 책 곳곳에 삽입된 그림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예뻤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찾는 행복도 어딘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을 텐데...... 예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