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나는 딸기밭에 있었다.

흙 묻은 손톱을 식탁 밑으로 감추며

by 신주


수녀원의 아침은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신의 시계추처럼 움직였다.


아침 7시.

차가운 종소리가 수녀원의 묵직한 정적을 찢으면, 나는 홀린 듯 성전으로 향했다.

새벽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성당의 공기는 폐부를 찌를 듯 시렸고,

수녀님들의 낮은 그레고리오 성가는 기도라기보다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짓눌렀다.


웅얼거리는 라틴어 기도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딱한 장의자에 무릎을 꺾고 앉아 신의 침묵을 견디는 일뿐이었다.


오전 8시.

아침 식탁은 지독하게 단순했다.

접시 위에는 투박하고 딱딱한 검은 빵 한 조각과,

정원에서 직접 만든 선혈처럼 붉은 딸기잼만이 놓여 있었다.


빵을 자를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식당 안의 정적을 날카롭게 그었다.

나는 그 메마른 빵을 씹으며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가난의 텁텁함을 삼켰다.


식탁 위로 냉랭한 기도가 가라앉기도 전,

수녀님은 쪽지 한 장을 건네며 나를 난민 학교로 등 떠밀었다.


그곳에는 이란, 이라크, 튀르키예에서 사선을 넘어온 이들로 가득했다.

히잡 아래로 형형한 눈빛을 내뿜는 여인들 사이에서,

독일어 한마디 못 하는 유일한 동양인 유학생의 사정은 아무런 무게도 갖지 못했다.

그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나 또한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단어조차 없었다.


부모라는 든든한 외투를 벗겨낸 자리엔,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는 무능하고 발가벗겨진 '나'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 지독한 익명성이 오히려 오기를 깨웠다.

가진 게 없으니 더는 잃을 것도 없다는 처절한 자각.


나는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칠판 위의 단어들을 하나씩 씹어 삼켰다.


그렇게 단어 하나에 기대어 낯선 땅에 내 자리를 조금씩 다지고 있을 때,

옆자리의 여자가 내 정적을 꿰뚫었다.


“한국은 IMF 때문에 금이빨도 뽑아서 나라에 바친다며?”


그녀의 질문은 내가 배운 어떤 독일어 단어들보다 날카롭고 선명하게 가슴팍을 찔렀다.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난민 주제에…”


라는 비겁한 우월감이 뱀처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비릿한 마음을 누른 건 더 잔인한 현실이었다.


세 아이를 품고 국경을 넘은 그녀 앞에서,

부모의 송금이 끊겼다고 세상 무너진 듯 비틀대던 나는 가장 유약한 난민일 뿐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내 손을 투박하게 맞잡으며 속삭였다.


“새벽에 딸기 따러 갈래?”


다음 날 새벽 네 시,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어둠을 뚫고 들판으로 나섰다.

끝없이 펼쳐진 딸기밭 위로 칼날 같은 새벽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단 두 시간의 노동. 허락되지 않은 이방인에게 주어진 ‘불법’의 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터질 듯 방망이질 쳤고,

손끝은 공포로 덜덜 떨렸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얼어붙은 손끝으로 붉은 딸기를 움켜쥘 때마다

툭툭 터지는 과육은 마치 내 상처에서 흐르는 피 같았다.

손가락 마디마다 스며든 붉은 딸기 물은,

이방인의 가난이 새긴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자 오늘을 살아낸 내 유일한 훈장이었다.


해가 지평선 위로 고개를 들기 전,

수녀원의 아침 종소리가 정적을 찢기 전 나는 돌아왔다.


흙이 까맣게 낀 손톱을 식탁 밑으로 감추며 기도할 때,

수녀님은 조용히 미소 지으셨다.


아마 그분은 다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내 몸에서 배어 나오는 흙냄새와 기도보다 더 절박했던 내 생존의 숨소리를 모른 척 눈감아 주셨을 뿐.


그날 처음으로 내 힘으로 번 돈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묵직했다.


그것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었다.

타인의 도움 없이도 이 낯선 땅에 뿌리내릴 수 있다는 최초의 ‘생존 증명서’였다.


뒤돌아보면,

나의 독일 첫 커리어는 화려한 도심의 마천루나 번듯한 대기업 빌딩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 시작은 새벽 네 시,

차가운 안개가 자욱한 딸기밭 흙바닥 위에서,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붉은 생존을 움켜쥔,

비천하지만 고결한 노동 속에서였다.


그리고 나는 그때 미처 몰랐다.

흙 묻은 손으로 함께 웃으며 딸기를 따던 그 이라크 여인이,

훗날 내 인생의 가장 절박한 벼랑 끝에서 내 손을 잡아줄 가장 소중한 귀인이 될 줄은.



- 다음 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