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힘들었던 그 자리에, 발자국은 하나였다.
스무 살의 나는 독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한 동안 나만 몰랐다.
수녀원의 모든 것은 비정하리만큼 정갈했다.
매일 아침 빳빳하게 다림질되어 날을 세운 하얀 침대 시트,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는 반질반질한 복도.
그 완벽한 질서가 너무나 견고해서,
내 낡은 외투와 텅 빈 주머니조차 그 성스러운 풍경의 일부인 줄만 알았다.
가난은 비명 대신 침묵의 옷을 입고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어느 날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었을 때였다.
시리도록 하얀 시트 위로,
엄지발가락이 구멍 난 양말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얼른 이불속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몇 시간 뒤면 다시 새벽 네 시의 잉크빛 어둠을 뚫고,
그 차가운 딸기밭으로 나서야 했으니까.
매일 아침 식탁 위에 놓인 그 붉은 잼.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노동 허가도 없는 불법의 시간.
누군가의 발소리만 들려도 몸을 낮춰야 했다.
불법의 몸은 늘 그렇게 작아져야 했다.
새벽 밭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이슬에 젖은 잎사귀가 팔뚝을 스칠 때마다 차가운 물기가 소매 안으로 스며들었다.
허가받지 못한 시간에, 허가받지 못한 손으로, 나는 붉은 것들을 땄다.
누군가의 식탁 위에 오를 딸기를.
내 손끝에 남는 건 그 붉은 진액뿐이었다.
오후가 되면 난민 학교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학생인지,
하루를 버텨내는 생존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시간들을 살았다.
낯선 독일어 단어들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머릿속을 굴러다녔고,
나는 기댈 곳 없는 고독을 문법책 사이에 끼워 넣으며 견뎠다.
밤늦게 수녀원 방으로 돌아오면 몸은 낡은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책상 위의 성경책을 펼쳤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어가며 웅얼거렸지만,
납덩이같은 피로가 눈꺼풀을 끌어내렸다.
활자들이 검은 개미 떼처럼 흩어졌다.
나는 성경책 위로 무겁게 이마를 떨구었다.
그 밤, 나는 정원에 있었다.
꿈이었는지, 아닌지, 지금도 모른다.
콧등을 간지럽히는 싱그러운 흙내음,
빗물에 젖어 낮게 드리워진 풀잎들.
수녀원의 뒷마당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때 낯선 신음 소리가 들렸다.
정원 한편에서 한 여자가 아이를 낳고 있었다.
곁에 있던 수녀님이 다급하게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물을 길어 와라, 어서!”
나는 달렸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내 구멍 난 양말 사이로 차가운 진흙이 밀려 들어와 발가락을 끈적하게 움켜쥐었다.
숨이 가빠 턱끝까지 차오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원 문 너머,
뉘엿뉘엿 저무는 저녁의 잔광을 등진 채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두 팔을 넓게 벌린 채. 거창한 후광도, 요란한 말씀도 없었다.
이 세상 어떤 상처도 다 받아낼 것 같은 표정으로,
그분은 묵묵히 다가왔다.
절박하게 물을 찾아 헤매던 나의 가난한 걸음 속으로.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소멸했다.
오직 그분의 발자국 소리만이, 천천히 내 심장 소리를 덮어왔다.
눈을 떴을 때, 방은 어두웠고 히터가 낮게 가르랑거렸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렸다.
뺨이 따뜻했다.
그 온기가 아직 거기 남아 있었다.
피로가 씻겨 나간 자리에,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평온함이 고여 있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러나 분명한 무언가가.
다음 날, 담당 수녀님께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수녀님은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더니, 손을 꼭 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이야기는, 이제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평생을 기도해도 그런 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고 했다.
누군가의 시기심이 이 귀한 평온을 깨트리게 두지 말라고.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 비밀을 가슴 가장 깊은 서랍 속에 밀어 넣었다.
30년이 지났다.
나는 아직도 그 새벽의 푸른 정원을 잊지 못한다.
돈도, 가족도, 기댈 언어도 없던 스무 살의 이방인.
나는 분명 혼자였다. 하지만 그 밤이 내게 남긴 문장은 달랐다.
너는 단 한순간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인생을 돌아보면 두 줄의 발자국이 나란히 걷다가,
가장 힘들었던 구간에 이르러 한 줄만 남는다고 한다.
우리는 묻는다. 왜 그때 나를 혼자 두었느냐고.
그때 주님은 대답한다.
“그 발자국은 나의 것이다.
네가 너무 힘들어 걷지 못할 때, 내가 너를 업고 걸었기 때문이다.”
신발도 벗은 채 맨발로 버텼던 그 시린 밤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따뜻한 품 안에 있던 시간이었다.
딸기밭도, 난민 학교도, 빗물 젖은 아우크스부르크의 골목도.
그 모든 길을,
나는 혼자 걷지 않았다.
다만.
그 사실을,
한동안 나만 몰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