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낯선 곳에서 비로소 혼자가 아니었다

수녀원의 문을 나서자,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by 신주


햇빛에 까맣게 타 들어가던 여름이 지나고,

손끝이 하얗게 얼어붙던 독일의 겨울을 홀로 견디는 동안

내 안의 무언가가 조용히, 소리도 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던 새벽, 딱딱한 검은 빵을 씹으며 삼키던 가난.

젖은 흙냄새가 밴 손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이어 붙이던 그 고단한 시간들.

그렇게 내 영혼이 바닥을 보일 무렵이었다.


비와 햇빛이 변덕스럽게 교차하던 어느 4월의 오후.

난민학교 교실 안에는 여러 나라의 언어가 뒤섞인 채 낮게 웅상거리고 있었다.

그 소란 속에서, 그녀가 내 옆으로 가만히 몸을 기울였다.


“우리 집에 올래?”


그 말은 조용했지만, 내가 서 있던 위태로운 세계를 통째로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수녀원을 나왔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낡고 묵직한 나무문이 내 등 뒤에서 천천히, 그리고 깊게 닫혔다.


‘덩그렁’


그 둔탁하고도 낮은 소리는 내 삶의 한 단락이 완벽하게 정리되었음을 알리는 가장 엄숙한 선언이었다.


매일 아침 영혼을 깨우던 종소리, 검은 빵을 자르던 서걱거림, 낮은 기도문 속에 섞여 흐르던 정적.

그 모든 정갈하고 고독한 고요가 손때 묻은 나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앞에, 전혀 다른 세상이 정면으로 들이닥쳤다.


낮게 쌓아 올린 컨테이너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공기 중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낯선 향신료 냄새와 젖은 흙먼지가 뒤섞여 출렁였다.

어딘가에선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고, 또 다른 어딘가에선 비트 강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곳은 국적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밤을 견디는 지도 위에 없는 섬이었다.


나는 낡은 검은 가방 하나에 내 전부를 싣고, 그녀의 뒤를 따라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작고 마른 몸으로 서로를 밀치며 웃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생명력.


그 소란스러운 틈에서, 그녀의 세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세상에 흠뻑 젓어 말 한마디 못 하는 낯선 동양인 어른 앞에,

아이들은 그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었다.

그 무해한 눈부신 웃음이, 견고하게 얼어붙어 있던 내 안의 무언가를 울컥 무너뜨렸다.


그녀를 따라 컨테이너의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올랐다.

발을 디딜 때마다 ‘텅텅'거리는 소리는,

수녀원 복도에서 숨을 죽이게 만들던 차가운 '끼익-‘ 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마치 축제를 알리는 어린아이의 북소리 같았고,

낯선 이방인을 환영하는 거칠지만 다정한 박수 소리 같았다.

나는 그 리듬에 맞춰, 내 생애 가장 낯설고 가장 살아있는 곳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방은 컨테이너 구석, 다락방처럼 낮은 천장 아래 있었다.

얇은 매트리스 하나와 작은 전등, 그리고 벽 한쪽에 걸린 빛바랜 옷 몇 벌.

그곳이 그녀와 세 아이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전부였고, ’우주'였다.


문 앞에 멈춰 선 내 머릿속으로 수녀원의 방이 스쳐 지나갔다.

삐걱거리던 침대, 벽에 걸린 십자가, 그리고 비 오는 밤마다 들리던 고요한 숨소리.


그곳은 가난했지만 조용했고, 이곳은 더 가난했지만 살아 있었다.


그때, 아이 하나가 내 손을 잡았다. 작고 따뜻한 손.

나는 그 온기에 이끌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 냄새’ 가득한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날 저녁, 공동 식당에는 눈물겨운 환대가 차려져 있었다.


각자의 나라에서 쫓겨오며 품속 깊이 숨겨왔을 비릿한 고향의 향신료와 아껴둔 양고기가 식탁 위에 올랐다.

돌돌 말린 야프라키의 고소한 향과 숯불에 구워낸 케밥의 진한 육향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며,

이제 막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이름도 모르는 이방인을 가장 뜨거운 온기로 맞아주었다.


입안 가득 번지는 낯선 향신료의 맛과 처음 들어보는 이국의 언어들.

하지만 그 낯섦은 이내 형용할 수 없는 온기로 변해 내 몸을 감쌌다.


사방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난민촌이었지만,

그곳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나를 안아주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요람이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천장이 낮았고, 아이들의 숨소리가 가까웠고,

어딘가에서 낮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낯선 곳에서, 나는 비로소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 다음 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