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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랭크 Nov 25. 2024

[캔버스에 비친 내 모습]  과녁과 과정

 최근 미술 수업을 가는 날에는 연습이 될만한 몇 점의 그림을 미리 찾아간다. 익숙해진 수업에 비해 여전히 느낌을 살리기 쉽지 않아서다. 일전에 미숙했던 부분들을 모아 그려보는데 옷깃의 그림자를 표현하는데도 쩔쩔매며 1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밝음과 어둠을 더듬어 자연스러운 입체감을 빚어내는데 서투름을 알 수 있었다.


 이번주도 수업을 위해 핀터레스트에서 몇 점의 그림을 살펴보던 중 눈에 띄는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추상화로 뒤엉키고 뒤틀린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러운 그림임에도 내 것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자 되려 위로받음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https://anderson.stanford.edu/collection/figure-8-by-franz-kline/



 작년 겨울에 왜 미술학원에 왔었나 생각을 해보니 마음속의 심상을 어떤 형태로든 끄집어내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형태는 모르지만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형태를 갖추기를 기대했었다.


 그것이 일과 생활에서 잔뜩 억눌린 하루이든, 시간이 굴러감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인 씁쓸함이든, 지친 누군가의 뒷모습에 대한 공감이든 무엇이든 관계는 없었다.  답답함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다음날 수업을 시작하며 찾아봤던 그림을 공유하며 강사분과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느낀 감정 누군가에 발로 차인 듯, 혹은 춤을 추어야만 하는 누군가의 모습. 여기에 대한 내 일상의 공감을 전했다.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보는 사람에 대한 얘기로도 이야기가 번졌다.

"관람자 입장에서는 작가가 삶의 고난을 부여하고 탐색한 기록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와 다른 경우가 꽤 있어요. 물론 고단한 과정을 통해 도달한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기 때문에 얘기드리며 조심스럽기는 하네요."


 운동감과 억지스러운 지탱을 어떤 장치로 내가 느끼는 것인지도 얘기 나누었다.

"지금 느끼는 강렬함은 기술의 영역으로도 해석할 수 있어요. 가장 명백한 보색인 흰색과 검은색의 배치만으로 이미 강렬한 인상을 주게 되고, 한 획으로 그었을 듯한 선으로 역동적인 감각을 전해줄 수 있죠."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한 획으로 그어진 것 같지만 검은색 위에 흰색, 흰색 위에 검은색을 수정해 간 흔적도 살짝 보이네요. 이러한 표현은 아마도 서예의 '갈필'이 모티브가  되었을 거예요.  아마 그림을 그릴 때 어떤 이미지를 보면서 그려나가기는 했을 것 같습니다.“


강사분도 많이 고민했던 주제인지 꽤 긴 이야기를 그 뒤로 나누게 되었다. '그리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 사이의 공간에 대한 얘기였다.

"OO님이 말한 것처럼 현실의 어떤 고통이 담겨 있던 것인지는 감상의 몫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큽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른 활동이어서 의미부여도 관객이 능동적으로 하게 되구요. 화가가 심오한 삶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그렸을 가능성은 생각보다 낮습니다. "


 문득 많은 팬을 가진 오랜 경력을 가진 온라인의 멘토들이 떠올랐다. 최근 부쩍 이들의 발표나 자료들이 많아졌는데 시의 적절한 주제와 경험이 뒷받침된 이야기여서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연이 닿아 생업에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현실의 문제를 풀기보다는 강의와 온라인의 생활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경우들을 종종 보았다. 혹은 한마디를 덧붙여 지혜를 공유한 영상은 제목과 달리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어 동영상을 보지 않은 채 공유했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한 적도 있다. 어떤 이들의 조언은 깊이 있는 멘토라는 이미지를 설계하여 동작하기도 한다.



 한 화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인정받는 화가로 현재의 화풍을 가진 과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화면에서 중요한 것만을 남기기 위해 빼고 빼었더니 남은 것이 슬픈 추상이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또 완전해 보이지 않고 여러 길을 배회했고 지금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인터뷰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강사분께 물었다.

"현대미술에서는 규칙이 없는 게 혹은 규칙을 부수어 버리는 것으로 인정을 받는 경향이 있는데 최근에 성공하는 작가들도 이러한 면모로 주목받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때 깊이가 결정되는 것은 작가에게 과정이 있었느냐인데 저 같은 경우는 화가에게 변화해서 현재 작품에 도달하기까지의  중간의 과정을 가졌느냐, 그 작품들이 있었느냐로 작가의 진정성을 생각했던 것 같네요."


" 그런 의미에서 이 단계를 뛰어넘고 대중의 주목을 받는 이들 중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어요. 중간의 과정이 함께 공유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부재했던 것으로 보이거든요."


"하지만 섣부른 평가는 늘 의식적으로 피하려 해요. 과정을 뛰어넘는 지점에 바로 도달하는 작가들이나 보는 이에게 가장 적확한 감정을 전달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까요."


 내가 몸 담고 있는 기술업계도 최근 10년 간 극심한 변화를 거쳤다. 많은 기술이 공통화되고 접근성이 높아진 덕분에 더 이상 연차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과거의 지식은 10년 이상의 주기 안에서 과정을 통해 축적되었는데, 최근에는 3년 주기로 뒤엎어지며 사실상 모든 것이 변해왔다. 그 사이 3년의 경력에도 이미 10년이 넘는 경력자를 주도하거나, 조직을 담당하고 이끄는 경우도 쉽게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이들에게 삭제된 축적의 시간이 문제가 없는 것인지 의구심을 조심스럽게  갖고 있다. 빠른 조직 변화에서 리더십을 부여받은 이가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진 팀원들의 고민과 자세, 사업측면에서 기술을 바라볼 때의 가치,  접목시키기 위해 필요한 부스러기 같은 지난한 일들을 모두 이해하여 통합을 염두하는 것인지 아직은 증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축적의 시간이 과연 쓸모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 조직의 구조와 방식에서 비롯된 원리이기에 없어도 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래도 좋다. 나의 의견과 관계없이 누군가의 가치는 평가될 것이고 빼어난 사람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거의 시간은 증명해 낸 이에 의해 평가되는 시대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공감이 갔던 말을 강사는 건넸다.

"과거에는 과녁에 중점이 있고 거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각자의 점과 방향이 모두 다르지만 계속해서 가고 있느냐가 중요하더라구요. 20년, 30년 성실하게 나아가면서 어딘가에 결국 도달하는 이들이 가장 대단한 것 같습니다."


  크기도 길이도 색도 모른 채 엉켜 있는 몸 안의 실을 풀어낼 수 있는 그날을 상상한다. 공허하게 답답하게 간혹 지탱하게 해주는 그 실을 꺼내어 낼 날을 떠올려본다.


꾸준하게 같은 노력을 하며 과정 자체가 이야기의 형태를 띠기를 기대해 본다. 마침내 풀어낸 실이 길 위에 곧게 긴 선으로 놓인 모습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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