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계발, 욕심은 관리할 수 있는 의욕이다

자기 계발, 욕심은 관리할 수 있는 의욕이다



1.

잘 살든지 또는 그렇지 못하든지 간에 세상살이라는 게 욕심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날까지도 자신의 욕심을 쫓아가는 여정일 수도 있다.


항상 허기진 듯 허연 얼굴을 번뜩이는 욕심의 탐욕스러움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내버려 두고, 욕심이 가는 길을 말없이 따라나서는 것이 좋은 것일까. 아니면 중용의 지혜를 쌓아 그 욕심을 비워내어야 할까. 이른 아침 눈뜨자마자 드리는 새벽기도로 내 안에 꾹꾹 눌러 넣어야 할까. 아니면 새벽 첫 예불에서 경건한 108배를 올리며 고개 돌려 외면해야 할까.


“과연 욕심이란 것이 비워 내어야만 하고, 회피하여야만 하는 검은 마법 같은 것일까.”


욕심은 보기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갖고 있는 삶의 한 현상이다. 욕심은 삶을 이루고 있는 필수 영양소이며 결코 회피의 대상이 아니다. 욕심을 애써 회피하려고 해선 안 된다. 잘 살려는 욕심은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며, 그것을 자신의 모습 중에 하나로 인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욕심은 분명 나 자신이기도 하지만 내가 관리해야만 하는 나의 또 다른 부분’이라는 것이다. 욕심은 피하에 쌓인 지방이 나의 형체를 바꾸어 놓듯, 의지가 약해지는 순간 나의 몸과 영혼을 덮어버리는 또 다른 나의 한 모습이다. 욕심은 적당한 운동을 통해 나의 몸매를 관리하듯, 관리가 필요하고 다스릴 수 있는 나이다. 그렇다면 이 욕심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까.


욕심의 관리를 위해서는 욕심의 이면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성질을 낮 시간의 밝은 태양 아래로 끌어내어야 한다. 그 성질은 이미 욕심의 한 부분으로 있어왔지만, 진정 필요한 결정적인 순간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나의 몸속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나 자신 만이 그것을 끌어내고, 그것이 나의 의지에 대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때 비로써 ‘의욕’이라는 실체로 불리게 된다.


“욕심을 의욕으로 변화시킬 때, 욕심은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2.

욕심이란 단어에서는 왠지 부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진다. 어두운 그늘 같기도 하고 슬픔의 제공자 같기도 하다. 실제 욕심은 종종 시기와 질투의 원천이기 되기도 하여 사람을 빠져나오기 힘든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이에 반해 의욕이란 단어에서는 밝고 긍정적인 힘이 느껴진다. 왠지 햇살 파란 평온한 들판을 뛰어노는 듯한 밝은 힘이 오르게 하고, 잔잔한 물살이 반짝이는 바다를 향해 이제 돛을 올린 범선의 활기찬 기운이 느껴진다.


그 의욕은 나의 능력을 일으켜 세우려고 나선 자기 계발의 항해 길에, 등 뒤에서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 같은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나 자신의 계발은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던 매몰찬 욕심을 의욕으로 변화시킬 때 비로써 앞으로 나아가는 속력을 높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자기 계발에 나선 사람이라면, 자신 안에 숨어 있던 의욕을 자신의 얼굴 표정과 몸의 근육, 정신과 영혼에 끌어내어야만 하는 것이다.


욕심이나 의욕, 둘 다 매니아적 기질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매니아적이란 건 광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욕심과 의욕이 품은 광기는 그 정도가 크게 다르다. 욕심의 광기는 통제가 어려운 극단으로 치닫기 일쑤이지만, 의욕이 가진 광기는 관리 가능한 정도이다.


이렇듯 욕심과 의욕은 애초부터 태생이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비이성적이고 고집 센 거친 욕심도 잘 관리하고 다스리게 되면, 이성적이고 순한 의욕으로 변화되어 자신의 계발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관리할 수 없는 지나친 욕심은 무모한 충동을 일으켜 일을 망치게 할 수도 있다.



3.

욕심이 없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누군가 '나는 욕심이 없어'라고 얘길한다면 그것은 '나는 이미 체념했어'를 돌려 말하는 것일 뿐이다. 체념은 무모한 충동만큼이나 자신의 삶을 망치게 할 수 있다.


성공한 욕심은 영웅을 만들기도 한다. 대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더 대왕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무엇이 젊은 알렉산더로 하여금 동쪽으로 그리고 또 동쪽으로, 끊임없이 말을 달리게 하였을까. 그가 살았던 고대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그의 욕심으로 인해 희생을 당해야만 했던가. 그 전쟁이 만든 희생자들의 비극과 처참함을 생각하면, 그들 개개인의 희생이 인류 사회의 발전을 위한 값진 밑거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할 권리를 가졌을까.


젊은 사내 알렉산더 한 명의 욕심이 빚은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희생자들의 불행은 누구 때문이고 무엇 때문인가. 혹시 알렉산더의 욕심이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멈추었다면 어땠을까. 알렉산더는 하늘 아래 최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오랫동안 잘 살았을까. 더 많은 고대의 사람들이 아들 딸 놓고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라는 동화의 마지막 얘기 같이 소소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알렉산더와 수많은 희생자들의 비극에는, 단 한 사람의 욕심이 그 원인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욕심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살피지는 말자. 어쨌든 그 한 젊은 사내의 통제할 수 없었던 욕심이 고대 문명사회 전체를 혼동과 파멸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알렉산더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영웅 알렉산더 대왕, 그의 이름에 붙은 대왕이라는 칭호는 이미 고유명사가 되었고, 그가 이룩한 대제국의 긍정적인 영향만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가.


알렉산더의 경우는 너무 극단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만큼 복잡하지 않다. 어찌 보면 단순하기까지 하다. 세상은 오직 승자만을 기억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사라져 간 무수한 약자는 쉽게 잊어버리는 법이다. 그게 세상이고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이다.


욕심은 굳이 고개 돌려 회피해야만 할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 자신의 몸 어딘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욕심을 애써 막아서는 안 된다. 잘살기 위한 욕심을 따라가다가 보면 어느 정도의 과오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지금 그것을 걱정할 것은 없다. 그 정도는 언젠가 지워지거나 잊어지기 마련이다.

분명한 것은 욕심 없는 사람에게서 부단한 자기 계발의 노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욕심을 통제하고 다스려 의욕으로 바꾸는 것이 지금 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자기계발교실,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