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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광장에서 피렌체의 석양을 맞는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피렌체의 석양을 맞는다     



1.

어둠이 갓 내려앉은 아르노의 강물이 어느 지중해 바닷가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수면처럼 아련하게 반짝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저녁 단장을 갓 마친 아낙의 은빛 미소 같아서 어여쁘기 그지없다.


잔잔한 물결에 감싸 안긴 피렌체가 어느 새,라고 해야 할지 벌써,라고 해야 할지, 하루의 끝자락에 서있다. 누군들 이 시간이면 저녁의 저 황홀한 빛에 물들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까, 혼잣말이 실없이 새어 나온다. 멀지 않은 저만치로 내려다보는 아르노 강은 커다란 호수를 구불구불 길게 늘어놓은 것 같아서 뉘엿하게 기운 저녁 햇살을 잔뜩 끌어모으고 있다. 저 매끈한 코발트빛 붉음이 강물의 인력에 대한 태양의 둥근 순응인지 뭉크의 <절규>와도 같은 빛의 각진 비명인지는 알 수 없다.      


저녁이 내려서는 미켈란젤로 광장에 오르면 피렌체는 온 밤을 새워서라도 채워 넣어야 하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구시가지를 빼곡하게 덮은 인간의 기와는 불그스름한 물감을 잔뜩 뒤집어썼고, 삐죽하게 솟은 종탑은 성전에 밝힌 저녁 촛불처럼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저 아련한 붉음에 눈이 멀고서야 피렌체를 ‘꽃의 도시 플로렌스’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된다. 어째서 세상은 멀쩡한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걸까, 괜한 투정이 새어 나온다. 


***


플로렌스 그녀는 노을빛에 채색된 안개꽃으로 온몸을 치장한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 좋은 시간이다. 누군가는 저녁별이 되어 동쪽 하늘 위에서 반짝인다.      

저 어여쁜 아낙은 지금껏 누구를 기다려온 것일까. 어느 사내를 기다렸기에 저리도 아름다운 저녁을 준비하는 것일까. 햇살 아래에서의 기다림이 검붉은 어둠을 맞이하고서야 활짝 피어나니, 짧지만 저 지독한 유혹을 어찌 눈으로만 담아 두라는 겐지, 원망일 수도 있는 설움이 복받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늦게 핀 꽃     


그 꽃은 저녁 늦게 피어

짙은 향으로 이방인을 유혹한다


햇살 아래에서 꼭꼭 닫아두었던 이성은

노을빛 강물의 여린 감성에

스르르 빗장을 열고야 만다    

 

저녁의 화려한 몸짓이

투명한 수면에 투영된

장밋빛 노을로 피어오른다  

   

오래 기다린 그 눈망울

이방인의 이성은 외면하지 못한다


그 꽃은 이윽고 심장에 스민다

이방인의 영혼은

늦은 만남의 향기로운 결실에 

성급하게 빠져든다    



           

2.

얼마나 지났을까. 저 아름다운 노을에 눈이 멀어 어둠이 짙어가는 것을 미처 지하지 못하였다. 모든 노을은 아름답다. 산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평원에서, 심지어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서도 저녁의 빛은 섬세하게 아름답다. 사람들은 어둠에 잠기기 전에 먼저 노을에 물든다.


무엇이 피렌체의 노을에 꽃을 피우는 것일까. 늦은 깨침이 더욱 선명해질 때도 있다. 아르노 강의 수면을 물들이고 구 시가지의 거리며, 돌집에 번진 노을은, 더 이상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아스라한 황혼의 빛만은 아니다. 빛의 황혼은 어둠의 여명이기에, 피렌체에서의 노을은 지는 것이 아니라 피어나는 것이 된다. 저 수줍은 오렌지빛 붉음은 예술과 인문학, 철학과 공존해온 피렌체인의 넉넉한 향기를 품은, 물기 가득 오른 밤꽃 잎의 화사함이다.     


아르노강이 품고 인간의 염원이 세운 피렌체의 조화는 중세 교회의 십자가를 가지 삼아 밤의 꽃봉오리를 맺는다. 어떤 미동조차 느낄 수 없는 평온한 저곳이 밤의 꽃이 피어나고 있는 플로렌스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어두운 돌계단을 걸어 내려와서 아르노 강을 끼고 걷는다. 물길은 분명 중력을 따라 흐르고 있지만 거슬러 오르든 따라 내려가든 중요치 않다. 오늘의 끝에 다다른 저녁의 여행자는 그냥 제 맘을 따라 걸어갈 뿐이다.    

       

저녁이 강물처럼 흐른다


저녁은 게으른 늙은 조랑말 같다

제 몸 치다꺼리를 포기한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인 듯

눈곱 가득 낀 큰 눈에는 

익숙해진 체념이 서려있다  

   

하루의 끝에 겨우 다다르자

묵은 포도주 빛 햇살이 먼지 낀 잔을 가득 채운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잠시 감기는가 싶더니

이윽고 강가에 다다른다     


낯빛에 반짝이던 낡은 물살은 사라지고

쉴 곳을 찾아 나선 듯

느릿느릿 흐르는 물의 무리만이

저녁의 풍경을 장식한다  

   

저녁의 강물은 그냥 흐를 뿐

사람의 눈길 따윈 생각지 않는다   

저녁이란, 스스로 흐르는 스스로의 

낯선 풍경이 되어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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