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르키소스, 카라바조의 어둠과 밝음의 인식에 대해

3. 나르키소스를 통해 본 카라바조의 어둠과 밝음의 인식에 대해



“카라바조는 대체 어떻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빛과 어둠의 변화를, 그 미세한 터닝 포인트를, 절묘함을 넘어 신비스러우리만치 아름답게, 잡아낼 수 있었던 걸까.”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그가 살아가며 저지른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위대한 화가로서의 삶과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삶, 그리고 거친 저잣거리에서의 삶을 이해하여 가는 기나긴 여정일 수 있다.


"만약 내가 카라바조와 동시대를 살아갔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지금의 생 이전에도 생이 주어졌었다면, 그리고 카라바조가 살아갔던 그 시대의 이탈리아가 그 생의 배경이었다면, 나는 어둠과 밝음을, 카라바조와 같은 눈으로 인지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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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작품 하나를 들여다본다. 그리스의 미소년 <나르키소스>(Narcissus, 110cm X 92cm, 1597-1599,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Italy)가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있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물의 색이 검다 못해 새까맣기까지 하다. 밤 보다 더 검은 물빛은 주변의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고 있지만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만은 삼켜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림 속에는 두 명의 [나르키소스]가 있다. 물 위를 내려다보고 있는 현실에서의 '밝은 그'와, 현실의 그 보다 더 '어두운 그'가 검은 얼음 같은 물의 표면을 경계로 그림 속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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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소스>(Narcissus), 110cm X 92cm, 1597-1599,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Italy)


“그림 속 두 명의 [나르키소스] 중에서 누가 진정한 그인 것일까.”


정논리로 보자면 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밝은 그'가 [나르키소스] 본인일 것이고 부논리로 보게 되면 수면에 비친 '어두운 그'가 [나르키소스] 자신일 것이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반한 나머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이긴 하지만 또 다른 그인 물속의 미소년을 끌어안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었고, 수선화가 되었다고 한다.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현실에서의 [나르키소스]와 물에 비친 또 다른 [나르키소스]를, 소극장의 좁은 무대에 오른 주연배우처럼 아슬아슬하고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툭 튀어나온 [나르키소스]의 무릎과 금세라도 물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두 팔, 잔뜩 긴장한 것 같은 얼굴과 목덜미에 조사되고 있는 강한 빛, 그리고 소년의 눈과 볼에 낀 그림자의 강렬한 음영이, 곧 수선화로 변할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는 듯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떨어져서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를 바라본다면 별빛 사라진 밤에, 혼자 떠오른 달의 빛이 오직 그만을 비추고 있는 것 같은 평온한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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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있어서는 악마적이라 할 만큼 탁월한 재능을 가진 천재화가 카라바조가 '빛과 어둠'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담아낸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이것이면서 저것이기도 한, 이것이다가도 저것이기도 한, 이것이 아닌 것 같은데 저것도 아닌 것 같은, 주저함과 머뭇거림이 일상 인양 자연스러운, 그래서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는 '양면적인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벌거벗은 듯 부끄러워지긴 하지만 평온한 시원함이 느껴질 수밖에."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양면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근본 원리이긴 하지만 결코 우리를 옥죄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렇기에 인간의 양면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현실의 세상은 남자와 여자 같이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공존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받쳐주며 살아가는 '살만한 곳'이란 것을.


세상이 속되다고는 하지만 속됨과 성스러움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이 둘은 겨우 몇 발짝만큼만 살짝 떨어져 있을 뿐이라서 어떤 날엔 속된 것이 다른 날에 성스러운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선과 악의 판단은 오직 신에게 속한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동쪽 하늘 끝과 서쪽 하늘 끝에 멀리 떨어져 걸려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살갗을 맞대면서 서로 격렬하게 부딪히지도 않는다.

속됨과 성스러움, 선과 악이 그러할진대 신이 아니라면, 누가 누구를 구원하고 심판할 수 있을까. 구원과 심판은 분명 상반되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대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과 심판을 하나의 줄 위에 세우지 않고, 신과 함께 삼각형 위에 세운다면, 서로가 양면적이지 만은 않고, 서로에게 좀 더 가까이로 다가서게 된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 또한 신과 함께 삼각형으로 세워진다면, 결코 서로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림 속의 두 명의 [나르키소스]가 카라바조 자신이자 나 자신인 걸까. 그렇다면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신은 어둠 속에 숨겨져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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