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카라바조의 성장과정과 미술의 시작에 대해

4. 카라바조의 성장과정과 미술의 시작에 대해


카라바조의 출생과 어린 시절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Michele Angelo Merigi 또는 Amerighi))는 1571년 9월 29일 이탈리아의 북부, [롬바르디아](Lombardia) 주의 주도인 밀라노(Milan)에서 아버지인 [페르모 메리시](Fermo Merisi(Fermo Merixio), 1540-1577)와 어머니인 [루치아 아라토리](Lucia Aratori, -1590)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페르모 메리시]는 [베르가모]의 남쪽 타운인 카라바조 지역의 한 후작(Marchese) 집안의 건축 장식가(Architect Decorator)이자 가정 관리인(Household Administrator)이었다. [베르가모](Bergamo)는 밀라노에서 북동쪽으로 약 40여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프스 산맥의 기슭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카라바조의 아버지는 스물두 살에 첫 번째 결혼을 하여 딸 [마르게리타](Margherita)를 낳았으나 2년 만인 스물네 살에 아내가 사망하면서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카라바조를 낳은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였다.

카라바조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는 4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첫째이자 장남이 현재 우리가 카라바조라고 부르고 있는 [미켈란젤로 메리시]이고, 둘째가 후일 예수회의 신부가 된 남동생 [조반니 바티스타 메리시](Giovanni Battista Merisi)이며, 셋째가 [카타레나 메리시](Caterina Merisi)이고 넷째가 [조반 피에트로 메리시](Giovan Pietro Merisi)이다. 이 중에서 막내인 [조반 피에트로 메리시]는 어릴 적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바조가 다섯 살이 되던 해인 1576년 그의 가족은, 당시 밀라노를 황폐화시킨 흑사병을 피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카라바조로 이주를 하였지만 카라바조가 여섯 살이 되던 해인 1577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흑사병에 걸려 같은 날에 사망하게 된다.


중세시대를 공포에 떨게 하였던 흑사병을 단지 14세기에 국한된 전염병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중세시대의 흑사병은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학자들에 따라서는 1346년에서 1671년까지 매 해, 그 규모가 크든 작든 유럽의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출현하던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르네상스] 또한 페스트가 아직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시기에 인류가 '흑사병과 함께' 이룩해 낸 소중한 문화운동인 것이다.

1576년 그 흑사병이 카라바조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던 밀라노 지역에 들이닥쳐 카라바조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게 되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가 휩쓸고 지나간 시대에 혼자 남은 여자의 몸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의 슬픔과 절망을 카라바조는 장남이자 첫째로서 묵묵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소중한 가족들과 지인들을 연이어 잃으면서 새겨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 세계에 어떤 식으로든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추측 가능한 일이다.


그 와중에도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흑사병 이후로도 카라바조의 가족은 그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이었던 [스포르차 가문](Sforzas Family) 및 [코론나 가문](Colonna Family)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는 것이다. 그들 집안과의 관계는 후일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예술가로서 성공을 거두는 데에 있어 중요한 발판을 제공하였다.


성장기의 카라바조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전해지고 있는 카라바조의 전기와 이야기들을 통해 추정을 해보면 카라바조는, 전염병을 피해 밀라노에서 카라바조로 이주했던 1576년 5살 무렵부터 13살이 되던 해인 1584년에 밀라노의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공방)에 도제로 들어가기 전까지, 카라바조라는 지역에서 계속해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라바조는 현재 약 16,000여 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약 32평방 킬로미터 (약 12평방 마일) 크기의 작은 타운이다.



카라바조의 본명과 카라바조란 이름에 대해

카라바조의 부모가 지어준 그의 원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이다. [미켈란젤로 메리시]라는 이름의 그가 카라바조로 불리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기, 태어난 곳 또는 출신지의 지명으로 화가의 이름을 부르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런 형식으로 보게 되면 카라바조의 전체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즉 ‘카라바조의 미켈란젤로 메리시’인 셈이다.


하지만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카라바조는, 밀라노에서 태어났지만 카라바조란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따라서 태어난 곳의 지명을 이름에 붙여 사용한다면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밀라노]Michelangelo Merisi da Milano)’ 즉, ‘밀라노의 미켈란젤로 메리시’가 되어야 한다.


"카라바조는 왜 태어난 곳의 지명인 밀라노가 아닌, 자라난 곳의 지명인, 그것도 어린 시절에 채 십 년도 되지 않는 시간을 보낸 카라바조란 지명이 자신의 이름이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을 카라바조란 지역에서 살았던 그가, 그림을 익히고 화가로서 토대를 닦은 곳이 밀라노에 있는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이니, 그 화실에서는 그를 '카라바조에서 온, 또는 카라바조 출신의 미켈란젤로 메리시'라는 전체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고, 전체 이름에서 '성'을 뺀 [카라바조의 미켈란젤로]로 줄여서 불렀을 것이다. 이것마저도 나중에 가서는 카르바조라는 지명만으로 그의 이름을 대신하여 불렀을 것이다.


또한 [미켈란젤로]였던 그의 이름이 카라바조로 불리게 된 것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살펴보면, <피에타>와 <다비드 상>을 조각하였고 로마 교황청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와 이름이 동일했기 때문에, 버전에 따라서는 타의에 의해 또는 카라바조 자신에 의해, [미켈란젤로]란 이름을 떼어 낸 것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듣기에 따라서는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흥미를 돋우기 위해 누군가 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비록 어떤 일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록이 꼭 사실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대개의 경우 기록이란 것에는 그것을 옮긴 이의 추측과 상상이 원래의 사실과 혼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기록은, 비록 그것에서 상당한 추측의 잔재가 느껴지더라도 '분명 그랬을 법하여 사실이라 인정하여도 될만한'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 카라바조가, 카라바조라는 지역명으로 불리게 된 것에 대해서는 ‘빈치라는 지역 출신의 레오나르도’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사례를 통해 설명하는, 여러 가지 사실일 것 같은 추정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진위는 오직 카라바조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카라바조 미술의 시작

카라바조는 어머니인 [루치아 아라토리]가 사망한 해인 1584년에, 밀라노에 있는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서 4년 동안의 도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태어난 해가 1571년이니 십 대 청소년기의 거의 대부분을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서 그림을 익히며 생활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이 시기는 굳이 부연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화실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후일 카라바조의 행적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의 추측은 가능하다. 또래의 사내아이들이 기성화가들의 시중을 들어가며, 나름의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서로 경쟁적으로 그림을 익히면서 생활하던 곳이 화실이었기에, 그 안에서는 여러 가지 거친 소동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사건들과 그들과의 관계를 통한 경험이 사춘기 카라바조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카라바조에게 [시모네 페트르자노]의 화실은 '화가 카라바조'가 있게 한 산실이면서도 '결핍의 카라바조'를 발현시킨 '애증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스승인 [시모네 페테르자노](Simone Peterzano)는 [베네토 주]의 주도인 [베네치아] 출신으로 당시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활동하던 [후기 매너리즘] 화풍의 화가였다.


Simone Peterzano_1589.jpg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자화상>(Self portrait of Simone Peterzano), 1589


1588년, 4년간의 도제 생활이 끝난 뒤에도 카라바조는 1592년 로마로 들어갈 때까지 4년 간을 더 밀라노와 그 인근 지역에 계속해서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의 카라바조의 행적에 대해서도 정확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지만, 카라바조의 그림과 그 이후의 행적을 통해 더듬어 보면, 카라바조는 그곳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북부지역인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 지역의 화풍이었던 자연주의와 매너리즘을 익혔을 것으로 봐야 한다.


이 시기에 카라바조는, 어머니가 물려 준 유산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같은 밀라노의 보물 같은 예술작품들을 돌아보며 꼼꼼하게 분석하였을 것이고 [베네치아]에도 들러서 그곳에서 유행하던 화풍을 접하면서 습득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의 화풍을 통해 추측해 보면, 4년이라는 이 자유로운 시간 동안 카라바조는 당시 로마에서 유행하던 [매너리즘]의 '양식화된 형식과 웅장함 및 단순함'보다는, '자연주의적인 디테일'에 관심과 가치를 두었던 [독일의 자연주의]에 가까웠던 [롬바르디아] 지역의 화풍을 익혔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시기에 카라바조가 머물렀던 [롬바르디아] 지역이 비록 이탈리아의 땅이기는 하지만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독일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비록 카라바조가 그림을 익히던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에서의 기록이나 작품, 도제가 끝난 후에 로마로 가기 전의 행적과 작품은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 세속을 상징하는 어둠과,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빛을 이용한 종교적 의미의 전달 기법, 등장인물들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표정과 동작, 사물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등과 같이 당시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자연주의적인 매너리즘]의 특징들을 카라바조의 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통해, 그 시기의 카라바조가 접하고 관심을 가졌던 화풍에 대한 위와 같은 짐작은 합리적이라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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