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는 일상의 그것과는 결이 다른 무엇인가가 문득 찾아질 것만 같다. 그것이 무엇일지, 대체 어떤 것일지는 지금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그것이 찾아질 것’이라고 믿기에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처럼 오늘도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날의 감상에 따라서는 같은 풍경이 색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사소한 짧은 스침조차도 물감을 이겨 쓱쓱 바른 한 폭의 그림이 되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발 밑을 뒹구는 마른 잎의 서걱거림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하루 종일 걸음이 멈춰지기도 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다.
어쩌면 그것은 가슴 한편에 숨어 가만히 살아온 또 다른 내가, 일상의 피곤함보다는 여행의 노독에 더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센강이 없는 파리는 얼마나 삭막할까.”
“만약 파리에 센강이 없다면 그 먹먹함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어제와 그 이전의 어제들처럼 센강을 찾아 나선다. 늦은 오전 무렵 개선문에서 시작된 걸음은 샹젤리제를 내려간다. 콩코드 광장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센강의 물길을 따라 에펠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다가가면 될 뿐이지, 에펠탑이 목적지일 필요는 없겠다."
에펠탑이 커다랗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걸음을 멈추고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펼쳐 든 지도의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눈길을 준다. 파리의 공기를 호흡하고 파리의 촉감을 느끼는 동안 센강과 에펠탑은 머릿속을 휘젓고 다닌다.
“아, 이제 알겠다. 센강과 에펠탑은, 지독한 사랑에 빠진 파리의 연인이라는 것을. 그들의 사랑에서는 누가 남자이고 누가 여자인지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파리의 하늘에 높이 솟은 에펠탑과 파리의 대지에 길게 누운 센강의 사랑이 파리지앵과 파리지앤느의 길거리 애정행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허공에서부터 땅까지 이어진 그들의 지독한 사랑이 태초부터 파리지앵과 파리지앤느에게 ‘사랑’이라는 유전자를 심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 * * * * *
바람 서걱대는 센강의 강변 저기 멀리에서 너무 선명해서 눈을 살짝 찡그려야만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낯선 사각의 물체 몇 개를 발견한다. 가까이로 다가가니 네모난 컨테이너 박스 몇 개가, 책상 서랍 속에서 색종이를 끄집어내어 정성스레 꼭꼭 눌러 접어 차곡차곡 만들어 쌓아 놓은 듯, 작은 강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유람선이 오가는 센강의 강가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색종이 마을이 누군가의 설치예술 작품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목적에서 저곳에 두어진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그냥 내버려 둔다. 임시로 대충 야적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는 곳이 파리이기에.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해, 왜 그런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애써 가늠해 내려는 일상의 버릇은, 파리에서는 꺼두어도 좋겠다.”
색종이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강둑에 앉는다. 강 건너편의 키 큰 가로수들이 가을의 옷을 갈아입고 있다. 울긋불긋한 바람 속에서 한 계절을 떠나보내고 다른 한 계절을 맞이 한다.
계절보다 더 빠르게 흐르는 것이 여행자의 시간이다. 벌써 여러 낮과 여러 밤이 두서없이 지나갔다. 며칠이라는 시간이 다시 지나고 나면 이 아름다운 파리를 떠나야만 한다.
괜히 인 이별의 느낌에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 온다. 이별은 이렇게 예견할 수 있고 지금까지 무수히 겪어 온 일상적인 것인데도 도대체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인간에겐 이별에 대한 내성 인자가 태초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 지었다는 원죄에 대한 형벌일 수 있다.”
태초의 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것은 인간의 또 다른 원죄가 된다.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들었다는 데, 그렇다면 신 또한 인간만큼이나 허술하다는 말인가.”
이별은 예감만으로도 만가輓歌의 가락처럼 애처롭다. 내성이 생기지 않으니 백신 따위는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 잔 먼지 묻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강둑 자리에서 일어난다. 비록 뿌연 구름에 가린 파리의 하늘이지만, 아직 오늘의 빛이 사방에 남아있다. 알록달록 어여쁜 센강의 색종이 마을과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몸에 딱 달라붙는 새 옷보단 헐렁한 헌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편하게 챙긴 천가방을 꾸려 메고 길에 나선다.
분주한 삶의 공간을 벗어나 들판으로 들어서자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엘비라 마디간의 2악장 선율 같은 바람이 검은 머리카락과 볼을 기분 좋게 쓸어내린다.
여행길은 사람의 귀와 눈, 피부의 감각을 아이의 그것처럼 마냥 열게 만든다.
여행길의 사각임은 그리움이란 투명한 물감으로 하얀 도화지에 그려 넣은 하늘에 찍은 구름의 노래이고, 동네 어귀에서 숨바꼭질하는 어린 술레의 질끈 감은 눈꺼풀에 어른대는 빛 같이 아련하고 먹먹한 기다림이다.
여행길에서 여행자의 나이는 안주머니 속에 숨겨둔 추억 바랜 사진 한 장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