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the Czech Republic)에 대한 기억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비둘기들만큼이나 들판을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이 흔했던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흔하다’는 것의 의미가 단지 ‘개체 수가 많다’는 숫자적인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체코의 들판에서 만났던 까마귀들이 알게 해주었다.
사실 하늘 길과 땅 길을 통해 여러 차례 찾았었던 체코에서 까마귀의 기억을 더듬어 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면서도 ‘흔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앞과 뒤가 맞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모순을 만들고 그것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본능의 부추김일 뿐이다.
어쨌든 체코라는 나라에 디뎠던 발걸음들은 언제나 프라하라는 도시를 향하고 있었다. 그 멀고 길었던 여정들은 체코를 가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기 보다는 프라하를 가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하긴 까마귀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진 ‘그’가 프라하에 살았었고 오직 프라하에서만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었기에, 그때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예정된 일이었을 뿐이라고, 그래서 프라하고 쓸려 들어가야만 했었다고 여기는 것이 옳을 수 있다.
간혹은 생각한다. 체코의 들판에서 만났던 까마귀들은 ‘그 사람’으로 인해 발생한 환시였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감성의 지배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이성적 판단을 앞세우며 살아가고 있는, 그렇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내가 행여 헛것을 보았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에도 어려운 일이다. 만약 그랬다면 정체성조차 흔들릴 수 있기에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행여 얼굴 붉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어떻게든 까마귀를 찾아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머릿속은 체코의 들판과 프라하의 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체코의 들판이, 프라하의 거리가, 까마귀가 흔한 곳이었던가.”
"프라하의 거리에서, 아니 체코의 들판에서, 까마귀와 조우한 적이 정말 있었던가."
두 발로 돌아다니던 프라하 거리의 기억과 자동차 안에 갇힌 채로 바라보던 체코의 들판이 기억 속에 뒤섞여 있으니, 애써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면, 프라하 거리와 체코 들판을 분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어쨌든 오늘은 체코 들판의 까마귀를, 프라하 거리의 까마귀를 찾아야하겠다는 생각에 바람 부는 그곳 들판으로 달려 나간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나가 버린 오래 전에 폴란드의 브로츠와프(Wroclaw, 브로츨라프. Breslau의 폴란드 명(名)) 시에서 브로츠와프 대학과 함께 주관했던 2박 3일 간의 학술행사가 있었다. 예정되어 있던 몇 몇 일정들을 끝내고 마지막 날 오후가 늦어서야 국경을 너머 체코의 프라하로 향해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었다. 사실 브라츠와프라는 도시가 볼 것 많은 관광지는 아니었기에 꼭 그곳이어야만 했던 분명한 이유는 없었다. 초청을 받아들고 지도를 펼쳐 보니 체코의 국경이 그리 멀지 않았고, 국경에서 프라하까지는 한참을 달려야만 할 것 같았기에 그 길에서는 왠지 뭔가 흥미로운 것을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선뜻 그 먼 곳까지 날아가게 된 것이었다.
그 이전에도 프라하를 찾았던 적이 있었지만 기억은 언제나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가만히 보면 기억이란 것은 어린아이와도 같은 구석이 있다. 종종 귀여운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가끔은 악의 없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뱉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냥 ‘씨익’하는 웃음으로 가볍게 받아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사내 어른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방법이란 걸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으니.
그날 오후가 깊도록 그리고 어둠이 내리는 시간까지 차창에 걸려 있던 체코의 낮은 들판 구릉에서는 누렇게 익어가는 홉이 바람에 이리저리로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고흐의 밀밭 같은 그 들판의 풍경에 빠져 선잠을 깜빡거리다가, 무언가의 ‘춤질’ 같은 가물가물한 움직임을 본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현상으로는 존재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선명한 형체를 빌어 더듬어 내기에는 어렵기만 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걸려있는 것 같은 신비로운 것이었다.
뽀얀 물거품을 몽글몽글 뿜어 올리는 갓 내린 생맥주의 기분 좋은 향기가 창을 넘어 삼투된다.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가는 체코의 들판을 느린 걸음으로 얼큰하게 걸어 다닌다.
“아, 다시 찾아오니 알 것 같다. 그것은 까마귀였다.”
금세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그때는 멀게만 느껴졌지만 그것은 까마귀들이 무리 지어 일으킨 검은 군무였던 것이다. 이제 까마귀는 때 체코 들판의 검은 점박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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