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작품에서는 출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작품을 아무리 더듬거리더라도 문의 흔적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카프카는 문제를 던지기만 할 뿐 그 문제의 출구 따위는 애초에 설계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카프카는 분명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사건을 던지기는 했지만 그것의 결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카프카 자신도 그 결말을 몰랐던 것일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카프카는 자신이 제시한 문제의 결말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카프카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문학적 동지였으며 또한 작가이자 편집자이기도 했던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를 평가한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프란츠 카프카는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정교한 사유의 탐색 과정을 살았던 작가이다.”
막스 브로트의 말을 조금 확대해서 해석한다면 카프카는 오직 과정만을 살았었기에 결말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카프카의 관심은 오직 과정에만 두고 있었다. 그는 문제를 던지고 ‘결말일 것 같은 것’을 향해가는 과정을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으로 풀어낸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들에서는 비극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의 극적인 상황들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그로 인해 주인공이 느끼고 있을 당혹감이 글을 읽는 이에게도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느끼는 ‘비극적인 감정’은 주인공을 넘어서 읽는 이에게까지 전달되고 있는 당혹감에서 출발하고 있다. 카프카는 비극과 당혹감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현상을 하나로 엮어 놓았다.
애초부터 입구만이 있었고 출구는 없었기에,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나가는 곳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은 카프카의 작품을 읽으면서 딱히 이것이라고 꼭 찝어 말하기 어려운 먹먹함과 안쓰러움을 주인공에게 느끼게 되고, 글을 읽고 있은 자신이 작품 속 주인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종국에는 자신에게도 느끼게 된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긴 여정 끝에 마지막 종착지’에 다다른 것 같은 안도감을 느끼긴 하지만 이내 그곳이 종착지가 아닐 수 있다는, 어쩌면 그곳이 ‘새로운 긴 여정을 출발지하는 곳’일 수 있다는 당혹감과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들어서는 입구는 분명 하나이지만 나가는 것은 어디에서나 자유롭다. 그것은 하나의 문단이 끝난 곳에서일 수도 있고 책을 덮는 곳에서일 수도 있다. 심지어 첫 장을 넘기면서일 수도 있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일수도 있다.
그것은 작품을 쓴 이인 카프카가 출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프카의 작품은 모든 것을 향해 무한정 열려 있기에 그것들에게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그로인해 마치 출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들 중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변신⟫을 통해 카프카 문학의 입구와 출구를 살펴볼 수 있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에 깨어나 자신이 커다란 벌레로 변태한 사건의 피해자 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이 부분이 독자가 카프카의 문학으로 들어서는 입구이다.
입구에 들어선 독자의 눈은 이제 호기심으로 반짝이며 카프카가 늘어놓은 검은 텍스트들 사이를 빠르게 걸어 다니게 된다.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에 처음에는 놀라지만 그레고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나씩 파악해 나간다.
비극적인 것은 그레고르의 몸은 비록 ‘벌레’로 변하였지만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독자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때까지 그레고르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가족들이 피해자인 그레고르를 흉물스럽고 기괴한 한 마리의 벌레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경제적 도움을 기댈 수 없게 된 그레고르는 더 이상 그들의 일원이 아니라는 듯 행동하는 가족들에게서 독자는 당혹감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레고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며 자신의 죽음은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철저한 고립과 배척 속에서 ‘가족이라고 믿었던 이들’로부터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모든 죽음이 비극적이고 고독하기 마련이지만 그레고르의 죽음은 특히 더 비극적이고 고독하게 느껴지게 된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도 독자는, 여전히 그레고르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여기까지 이르기도 전에 너무 일찍 그것에게서 벗어났을 수도 있다. 독자 나름대로는 그것의 원인과 의미를 찾아낸 것이다. 과정만이 전개되어 있을 뿐 결말은 애초부터 찾아지지 않는 것이기에 ‘여전히’라는 단어와 ‘너무 일찍’이라는 단어를 구분 짓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가장 인간다운 정신을 가졌던 그레고르는 벌레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그레고르의 죽음은 그 누구의 죽음보다 고독하고 비극적이다.
독자는 다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대체 누가 벌레이고 누가 인간인 것일까. 벌레와 인간 중에 누가 ‘더 인간다운’ 것일까. 마지막까지 자신의 가족들을 걱정하는 ‘벌레의 형상을 한 인간 그레고르’와 자신만을 걱정하는 ‘인간의 형상을 한 벌레만도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중에 누가 진정한 인간이고 누가 벌레인 것일까. 인간과 벌레를 단지 육체의 모습만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일까. 카프카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누가 벌레이고 누가 인간인 것일까. 카프카는 여기를 출구로 생각한 것 같지만 자신할 수는 없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그레고르 잠자의 마지막 출구일 수 있다. 실존 문학은 스스로를 극복하는 지점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카프카는 ‘출구 없는 문학’을 통해 스스로의 ‘마지막 출구’를 만들어 내었다. 그 출구는 장 폴 샤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실존주의 문학>으로 들어서는 입구이기도 하고, 알베르 카뮈가 말한 것처럼 <부조리 문학>에 맞닿아 있기도 하다. 그래서 카프카 문학의 빛이 더욱 밝게 빛나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을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문학으로,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문학으로 평가하고 있다.)
by Dr. Franz KO(고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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